한국일보

칼럼/ 망각의 계절

2009-12-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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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야 하는 존재이다. 이 죽음의 강을 건너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들은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사는 것 같다. 그 여유라는 말은 없는 중에서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베푸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언젠가는 이 죽음의 강을 건너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참으로 까칠하게 사는 것 같다.

12월인가 싶더니 어느새 이 해도 3주밖에 남지 않았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나 하며 지나온 한 해의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주어진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가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정말 열심히 살았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럭저럭 시간만 떼우며 1년이라는 세월을 값없이 보냈을 지도 모른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한해의 묵은 때를 정리하고 새것을 갖고 싶어 한다. 지난 한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중에서 나쁜 것과 상처받은 것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연말에 갖는 생각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잘못된 점은 반성하고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연말에 할 일이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고 취할 것은 취하고 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또 다시 다가오는 새해에 새로운 것들을 담기 위해서다.


지금은 쓸데없는 후회와 아픔으로 과거에 서성거릴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새로 담을 희망과 꿈만을 계획하고 생각해야 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희망의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실망스럽고 절망스럽고 불만스럽다 하더라도 이 연말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시간이다. 계획대로 하지 못한 일들이나 기대에 어긋나는 일들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모든 아픔이나 상처를 다 털어버리자. 죽자 사자 애쓰던 부의 꿈도 날아가 버리고 그렇게 지키려고 애를 썼던 집이나 건물, 혹은 가게의 실체가 이 해에 다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 따위는 이제 깨끗히 날려버리자.

사람들은 보통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망각하고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은 쉽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감사한 일은 기억하자. 은혜 받은 일도 반드시 기억하자. 지난 한 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해서 한 것이다. 누가 대신 살아준 삶이 아닌 것이다. 모든 일의 성패의 여부는 요인이 97%가 내부에 있고 외부요인은 불과 3%밖에 안 된다고 한다. 대망의 새해에 우리가 다시 아름다운 물감을 채색하자면 빈 도화지가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는 사색의 보석이 있지만 꺼내지 않기 때문에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어두운 생각, 아픈 마음, 나쁜 결과 등은 모두 잊어버리고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생각, 새로운 마음들을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한 준비를 이 해의 남은 기간 동안 하자.

레테 강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의 강이 아니라 신화속의 강이다. 누구나 이 강을 건너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는 망각의 강이다. 슬프고 외롭고 억울하고 그래도 조금은 기쁘고 조금은 행복했던 인간만사의 모든 사연들을 다 백지화하게 만드는 강이다. 결국 레테 강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이어령의 ‘차 한 잔의 사색’에서) 망각하는 방법을 알면 차라리 행복하다 할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망각이 없이는 인생은 살아갈 수가 없다.

니체는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망각없이 행복은 없다고 말했다. 망각은 만사를 고쳐주고 노래는 망각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노래 속에서 오직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올 한 해의 일들 중에서 불쾌하거나 나쁜 기억들은 망각의 강으로 모두 떠나보내자. 그리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남은 한 해를 가볍고 행복하게 보내자. 빈 마음이 되어야 새 해를 새 것으로 가득 채우면서 밝고 환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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