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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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혼다와 최준희시장

2009-12-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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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한인유권자센터 소장)

워싱턴의 권력서열을 따지자면 대통령 다음이 부통령이고 그 다음 3위가 하원의장이다. 상원의장인 부통령은 대통령과 거의 한 몸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2인자는 하원의장인 셈이다. 게다가 오바마 대통령은 풀뿌리정치를 강조하면서 하원정치를 하고 있어서 지금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면서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녀는 2001년, 당시 민주당의 사령탑이었던 미조리주의 딕 게파트 의원이 부시정부의 이라크전쟁에 대해서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때에 강력한 반대의 입장으로 리더쉽을 발휘하여 원내대표직을 가로챘다. 2004년도 그녀는 당의 리더로서 전국을 돌면서 민주당 의원들의 선거를 지원해서 확고부동한 지도자의 자리를 굳혔다. 그녀의 목표는 2006년 중간 선거전이었다.

부시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반 공화당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녀는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일리노이의 라움임매뉴엘(현재 백악관비서실장)을 임명하고 개인적인 대변인격으론 자신의 지역구와 붙어있는 산호세 출신의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을 끌어 들였다. 2006년 중간선거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워싱턴은 ‘낸시 펠로시’ 세상이 되었다. 물론 마이크 혼다의원의 역할이 크게 확장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수당이 된 민주당의 권력핵심에 마이크 혼다 의원이 진입하게 된 배경이다. 고작 5선의 마이크 혼다 의원이 435명 하원들의 선망의 대상인 세출위원회(Appropriations Committee)에 포진된 것은 펠로시 의장의 든든한 빽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결의안을 추진하면서 마이크 혼다의원에게 속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50명이라고 해서 64명을 확보해서 그를 만났다. 일본의 저지로비가 극성이라고 80명을 더 채우자고 했다. 아베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한 2007년 4월25일 104명을 확보했다. 의사당 카페테리아에서 만난 혼다 의원은 30명을 더하자고 했다. 그렇게 고맙게 여겨졌고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애시 당초의 결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망스러운 감정이 복받쳤다. 결국엔 168명을 확보해서 그해 7월30일 역사적인 일본군 위안부결의안이 하원 전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알고 보니 정말로 일본의 로비가 집요했었고 의원 개개인의 투표에 붙여졌더라면 장담하기가 어려웠었던 것을 알았다. 혼다의원의 속내를 미리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한인들과의의 약속을 지키는 것에 목표를 정했었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지난 8월, 마이크 혼다의원을 수행해서 한국을 방문했었다. 필자는 그와 함께 한인연방의원의 가능성에 대해서 정말로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중앙당의 확실한 지원만 있으면 전국의 한인들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졸랐다. 마이크 혼다 의원은 지난해 콜로라도 덴버의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아시안을 대표해서 연설한 뉴저지 에디슨시의 “최준희시장”에 대해서 여러차례 물었다. 추수감사절을 잘 지내라는 인사전화에서 마이크 혼다 의원은 잊지 않고 2010년 중간 선거를 언급했다 .

2008년 루이지애나주에서 베트남계가 연방하원에 당선되었다. 나라를 잃고 제 땅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 난민의 처지에서 악전고투한 전국의 베트남계가 힘을 합해서 이러한 일을 해냈다. “한인커뮤니티의 Fundrasing(기금모금)실력에 달려있다. 이를 위한 결심을 할 수 있는가..? ” 란 혼다의원의 목소리가 24시간 필자의 귓가에 머물고 있다. 연방하원 선거가 꼭 11개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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