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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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어느 익명의 독지가

2009-12-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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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열(취재 1부 부장대우)

얼마 전 브롱스에 거주하는 50대 한인 남성이 궁핍한 홈리스들을 수년동안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 듣고 취재에 나섰다. 자신도 그리 넉넉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홈리스 지원 단체에 매년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전달하고 있는가 하면 겨울이 되면 직접 헌 의류들을 수집해 기증도 해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기자는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그 남성과 연락이 닿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큰 자랑거리도 아닌데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며 그저 익명의 독지가로 남고 싶다고 했다.

“기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감동도 주고 한인사회에 선행도 확산시킬 수 있다”고 수차례에 걸쳐 설득했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나는 것이지 결코 나의 선행이 아니다”라며 한사코 마다했다. 사실 그 한인 남성처럼 묵묵히 불우한 이웃을 자기처럼 위하는 ‘따스함’을 요즘 세상에는 찾기가 쉽지 않다.실제로 각 한인 복지기관들에 따르면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불우 이웃을 돕자’는 소리가 한인사회 여기저기서 높아지지만 해가 갈수록 온정의 손길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거리에 놓여 있는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기온만큼이나 썰렁하게 비어 있으며, 양로원 등 복지시설들이 자체적으로 벌이고 있는 성금 모금 접수창구 또한 예전 같지 않은 실정이다.하지만 한인사회 곳곳 식당이나 연회장 등에는 벌써부터 송년회다 사은회다 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일부에서는 ‘부어라, 마셔라’ 식의 흥청망청 망년회 얘기로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올해는 극심한 불경기로 좀 덜 한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매년 이 맘 때면 으레 그렇듯이 고성방가의 연말 향연이 또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이제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어떻게 올 한해를 마무리 지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흥청망청 한해를 흘려보내기보다 브롱스의 그 40대 한인 남성처럼 주위의 불우이웃에게 조금이나마 온정을 베풀 수 있다면 그만큼 한인사회의 연말을 좀 더 훈훈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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