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문학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 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에 대한 결론을 ‘향수’를 쓴 정지용 시인의 말에서 찾는다.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열 하리라”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언어미술이란 언어예술이고 언어예술은 곧 문학이다. 어느 민족이든 간에 문학이 민족 정서에 기둥이 되어 그 민족을 떠받쳐 주는 한 그 민족은 열열 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열열’이란 두 글자의 풀이를 두고 고심을 한 적이 있다. 민족의 열열이란 문학 활동이 공산당 당원의 무분별한 열성적 정치활동이나 사회 활동이 아니라 따스한 열기를 만드는 ‘열’이라고 바꾸어 결론을 지어 규정을 했다.문학은 따스한 것이다. 문학이 잘 정리되어 민족정서 저변에 깔려 있으면 그 민족은 우선 따스한 민족이다. 동짓달 추운 밤, 따스한 온돌에 앉아 있으면 따스한 꿈이 생긴다. 문학은 따스한 언어 예술이고 꿈을 불러오는 창조적 예술이다. 문학이란 심성의 감동으로부터 오는 예술이다. 그 감동이란 문학에 있어서 재료인 것은 사실이다. 용광로에서 걸러낸 쇠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다르게 되고 용도가 다르게 된다. 쇠를 가지고 무기로 쓸 칼은 만들면 사람을 상해하는 무서운 칼이 되고 부엌에서 쓰는 칼을 만들면 생활에 유용하게 쓰이는 식칼이 된다. 솟을 만들면 음식을 익히는데 쓰이는 부엌살림이 되고 삽이나 쟁이를 만들면 농사에 쓰이는 농기구가 된다.
재료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게 되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용도가 다르게 되는 것이다. 언어가 바로 그런 것이다. 도예공이 흙을 고르고 흙을 빚어 모양을 내서 아주 뜨거운 가마에 넣고 구워서 도자기를 만들어 내듯이 문학을 하는 사람은 감동이란 재료를 골라 그 재료를 형식이나 내용을 알맞게 빚어 고뇌라고 하는 가마에 넣고 굽는 작업이다.사색의 고뇌란 감동을 잘게 부수어 가는 맷돌과 같은 것이다. 인성의 본질 속에는 향수라는 그리움이 침전되어 있다. 인생에 있어서 침전되어 있는 향수를 불러일으켜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살이 없는 앙상한 뼈다귀에 지나지 않는다. 향수를 그래서 곧잘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의 향수는 어딜까? 아마도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기 이전의 에덴동산일 것이다. 그 에덴동산에는 하느님이 계실 것이고 부모님 같은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아무런 걱정도 고뇌도 없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우리의 삶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공허할 때 형제와 같이 도움을 주
는 언어예술인 것이다.
인간은 신의 모조품이라고 기독교에서 말한다. 그렇다면 신의 모조품인 우리에게 있어서 신으로부터 받은 유전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유전자는 무엇일까? 나는 그 유전자는 언어라고 생각을 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에 분명히 쓰여 있으니, 그 말씀이란 언어이고 또한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쓰는 그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하느님의 유전자일 것이다.
이 유전자의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신의 모조품 노릇을 똑바로 하느냐 못하느냐의 판가름이 난다고 나는 늘 생각을 해 왔다. 말이 험한 세상에서 신의 언어, 즉 언어예술은 문학이고 이 문학이 인간의 심성으로 부터 충분하게 활용이 되어야 우리가 따스하게 되고 또한 민족과 사회가 따스하게 되어 가치관이 올바르게 정립이 되고 정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