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휘(언론인)
끝도 한도 없는 억겁의 우주시공 속에서 한 찰나를 살면서, 한 톨 모래알로 존재하는 나(個我)는 온 세상을 차지하고 영원을 살 것처럼 설친다. 그렇게 욕심많고 염치없는 나의 본체는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가을은 사색의 계절, 가벼운 마음으로 인생철학의 산책길에 들어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갈파했지만 2500년이 지난 오늘도 자신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남을 폄하하고 남의 잘못은 잘도 지적하면서, 정작 자신을 뉘우치며 깨닫는 일에 너무 소홀한 게 우리네 삶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가장 고뇌했던 부분 역시 ‘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인 듯하다. 하나의 예를 옮겨보자. 어떤 사람을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만일 천연두가 그의 미모를 빼앗아 갔다고 하면 그는 이미 사랑하지 않았을 테니까.그렇다면 이 ‘나’라고 하는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신체 속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영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는 그 인간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빌려 쓰고 있는 자격, 명성, 지위, 신분, 성격, 역할, 재능, 그리고 한시적 생김새(외모)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사람에게 붙어 다니는 부호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기도 어렵거니와 남으로부터 사랑받기도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의탁할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자기의 세계, 자신이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보람을 찾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에게 가장 슬픈 일은 자기가 마음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라
고 한다. 참새에게는 참새의 세계가 있고, 하루살이에게는 하루살이의 시공(時空)이 있다.문명사회를 일구었다는 인간은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개아의 상실, 자기 상실은 이웃 상실, 인간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구하는 게 아니라, 매스미디어와 대중 속에 함몰되어 나를 버리는 모순을 연출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특하다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의상을 걸치고, 남이 빚은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남이 엮은 홍보매체에 현혹되고, 남이 제정한 제도에 맞추어 나를 활용당하며 살아간다. 내 뜻대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없는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많은 사람의 틈새에서 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를 찾고, 나 자신을 섬기며, 나 나름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나를 알고 나를 찾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소중히 여기고,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꺼리를 찾아 나서자. 나에게 걸맞지 않은 일에 사로잡혀 끌려 다님은 내속의 평정을 깨뜨
리기 십상이다. 부엉이도 제 목소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를 가장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해서 이는 결코 이기적 행위가 아니다. 온전한 자기 사랑은 남과 이웃 사랑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