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정폭력-힘과 지배의 구조

2009-11-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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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뉴욕가정상담소 케이스 매니저)

가끔 상담소로 전화를 하는 사람들 중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들이 있다. 자신은 남성이며 가정폭력의 엄연한 피해자인데 법은 여성만 보호하고 피해자인 자신은 보호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다 이해받고, 우대받으며, 심지어 법으로까지 보다 많은 권리를 보호 받는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남성 피해자가 체감하기로는 정말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가정폭력 피해자의 95%는 여성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수가 보고 되지는 않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남성들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경우를 접한다. 그들은 피해자인 자신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요청해도 가해자로 오해받기 쉽고, 물리적으로 힘센 남성이 여성인 부인, 혹은 애인에게 폭력이나 학대를 당한다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 왜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힘도 세고 체구도 큰 남성이 몸집도 작고 힘도 약한 여성들의 폭력의 대상이 될까? 이는 가정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흔히 가정 폭력이라 하면, 부부 싸움 중에 혹은 데이트 중에 싸우다 홧김에 재떨이나 살림살이 던지는 등의 장면을 상상한다.


물론 그런 위협적인 행동들, 욕설, 물리력 행사 등이 모두 가정 폭력의 예이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한 사람이 다른 상대를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억압 등을 모두 포함한다. 문제는 힘과 지배의 구조에 있다. 두 배우자, 혹은 애인 관계에서 누가 누구를 물리적, 정서적, 경제적, 혹은 성적으로 지배하려 하는가의 관계가 핵심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힘 센 사람이 가해자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함을 알려 준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수치심, 우울, 무기력함, 정신적 황폐, 자책과 죄의식, 자아감의 결여 등의 감정 상태는 남성, 여성을 떠나 비슷하다. 피해자들은 학대나 폭력 상황을 벗어날 출구 하나 없이 정신적으로 자 고립되어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피해자를 신체적, 물리적 학대 외에도 정신적으로 학대함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이 무능력하고 쓸모없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폭력, 학대 상황을 자신이 초래했다고 믿게끔 되고, 설령 자신이 이런 상황을 얘기한다 해도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이 가정폭력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기까지 장애로 작용한다.

자신이 처한 가정폭력을 벗어나야 할 상황으로 인식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결심을 하기까지의 그 과정, 두려움, 고통은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모습이 이대로 계속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결심을 하고 용기를 내는 순간, 거기에는 그 과정을 함께 하고 도움을 줄 조력자들이 있다. 가정폭력은 일단 일어나면 이것은 중지되지 않고 그 주기와 심각성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 반복되는 폭력, 학대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나와 내 아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일임을 우리 모두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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