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늑하여라, 비 그친 월정사의 숲

2009-10-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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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국토종단기 <25> - 강원도 장평에서 월정사까지

진부면 지나면 ‘소도둑놈 마을’ 간판 눈길
월정사 스님께 여쭈니 하루 묵고 가시라
대웅전 추녀 끝에 초승달, 그 절묘함이란...

곽 사장과 함께 이효석 문학관을 찾았다. 장평에서 10분쯤 차를 타고 가니 이효석 문화마을이 나온다. 봉평면 남안동은 가산 이효석의 고향마을로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봉평장이 지금도 매 3일과 8일에 열리고, 해마다 9월 메밀꽃이 만발할 무렵이면 효석 문화재가 열린다고 했다.


봉평장터를 지나면 가산공원이 나오고,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면 물레방아간이 있다. 달빛에 취해 허생원이 성서방네 딸과 사랑을 나눴다는 소설 속의 장소다. 메밀꽃 환하게 핀 달밤에 물레방아 간에서 만난 남녀가 달빛에 취하는 장면을 연상한다.

여기서 2km정도 올라가면 이효석 생가가 나온다. 싸리 울타리에 둘러싸인 초가집이 포근하다. 36살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다는 작가의 모습을 그의 생가 앞에서 떠올린다.

숙소에 돌아오니 날이 저물었다. 걸어서는 하루가 걸릴 일정이어서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문학관을 들르지 못할 뻔 했는데, 곽 사장이 차로 안내해준 덕택에 다녀올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피곤이 함께 밀려온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곽 사장의 농장을 둘러보고 돌아와 장평에서 걷기 시작한다. 오늘 목표는 월정사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 맞바람을 맞으며 걸어간다. 들판에도 마을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잔 마시고 싶어 길가 파출소에 들렀더니 문 앞에 전화기 가 걸려있고 전화주시면 15분 안에 달려오겠습니다는 쪽지만 붙어있다. 바로 옆 면사무소에 들어가 물도 마시고 ‘민원인 용’으로 마련되어있는 컴퓨터로 메일도 보냈다.

속사 삼거리에 도착했다. 진부와 인제 갈림길이다. ‘만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근에 이승복 기념관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걸어갔다 오기엔 먼 거리라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차로 가면 잠깐이라며 주인아주머니가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아주머니의 차를 타고 6km를 ‘잠깐’ 사이에 달려 이승복 기념관에 도착했다. 1968년 무장공비가 이곳 용평면 산골초등학교 1학년 아홉 살짜리를 포함한 일가족을 죽였다. 그 때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말했다고 해서 사후에 반공 영웅이 되었다. 그의 동상이 전국의 초등학교에 세워졌다.

기념관에 ‘이승복군이 다니던 학교’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오른쪽 어깨에 책보를 끼고 서 있는 작은 이승복 동상이 교무실 입구에 서 있고, 운동장에 잘 만들어진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위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어린 승복이가 죽을 당시에 실제로 그 말을 했냐는 것이 문제가 되어 소송이 제기된 적이 있는데, 법원은 “더 이상 따질 수 없는 문제”라고 판결을 했다. 오늘은 아주머니 덕택에 이승복 기념관을 다녀오게 됐다. 나도 헤어지면 그만인 나그네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어줄 수 있을까.


월정사를 향해 길을 재촉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판초를 꺼내 배낭을 씌웠다. 진부면 푯말이 보이면서부터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우박이 섞여있다. 입김이 하얗다. 지나는 차들이 물을 치면서 달리는데, 대형트럭이 아슬아슬하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산길을 내려와 ‘소도둑놈 마을’입구 회관 옆 창고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마을 선전판에 ‘소도둑놈 마을’로 불리게 된 내력과 함께 산적문화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산적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라고 적혀있다. 비가 주춤하여 다시 걷기 시작한다.

진부를 지날 때 억수로 쏟아지더니 월정 3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오락가락한다. 바지도 신발도 비에 젖고, 배도 고프다. 아, 뜨끈뜨끈 김나는 국밥. 김치를 다문다문 썰어 넣고 밥과 함께 끓인 김치국밥 한 그릇이면 딱 좋겠다.

어둑할 무렵에 월정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비가 그쳤다. 황토길 따라 월정사 본채를 향해 올라가는 오른쪽 길에 초파일을 앞두고 연등이 길 따라 걸려있다. 한발 정도 간격으로 달려있는 저 등이 모두 몇 개나 될까. 2백여 미터 올라갔는데, 갑자기 연등에 불이 들어와 꽃등이 된다. 2km쯤 되는 길을 꽃등 따라 걸어가면서 묻는다. 부처님, 어쩌자고 이렇게 꽃길을 만들어 저를 환영해주시는 겁니까?

스님께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더니, 방 하나를 내 주신다. 샤워장 시설이 훌륭하다. 샤워하고 양말과 속옷 빨아 널고 뒤뜰에 나갔다. 대웅전 추녀 끝에 초승달이 걸려있다. 저 절묘함이라니! 월정사의 밤이 깊어간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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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서 월정사로 올라가는 길. 하늘로 곧게 치솟은 아름드리나무들은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여유 있는 사색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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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효석 문학관을 알려주는 사인판. 메밀 꽃이 한창인 9월에는 그를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풍성하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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