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 적봉 지역은 9천년 전 홍산 문명의 발상지
홍산 문명은 동이민족이 이룩한 세계 최고의 문명
중국정부도 인지
오랑캐라는 말은 중국아이들이 주변에 살던 미개한 종족을 멸시하여 불렀던 말이다. 그들 지나(中國)인들은 자기 민족을 제외한 주변의 민족들을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동쪽에 사는 우리 선조들을 동방의 오랑캐라고 하여 동이(東夷)라고 불렀고 서쪽에 사는 민족은 서쪽에 사는 오랑캐로 서융(西戎)이라 했고 남방에 사는 민족은 남쪽의 야만족 오랑캐라고 하여 남만(南蠻) 그리고 북방에 사는 민족은 북의 오랑캐 북적(北狄)으로 불렀다.2,700년 전 춘추시대부터는 오랑캐족을 다시 아홉으로 분류하여 구이(九夷)라 했고, 남방에 사는 민족은 여덟으로 나누어서 팔만(八蠻), 서방에 사는 민족을 일곱으로 나누어서 칠융(七戎) 그리고 북의 오랑캐는 다시 여섯으로 갈라서 육적(六狄)의 민족이라 했으니 얼마나 오만한 민족인가? 그러니까 동서남북의 동이(夷), 서융(戎), 남만(蠻), 북적(狄)은 원래가 한 민족인데 이 오랑캐같은 지나인들이 저희들 입맛대로 갈라서 수십 종의 민족 명칭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같은 국수를 가지고 자장면을 만들고 우동을 만들고 울면을 만들어 냈던 실력으로 우리 조상들의 이름을 마음대로 작명한 탓에 우리의 상고사를 헷갈리게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지나인들이다.그러니까 구이(九夷),팔만(八蠻),칠융(七戎) 그리고 육적(六狄)은 모두 구려족(九黎族=고구려)을 분해하여 지나의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종족 명칭이었다.그런데 그들이 동쪽 오랑캐라고 깔본 동이족이 그들이 만들었다고 우기는 한자(漢字)를 만들어냈고 북쪽 오랑캐족이라고 깔보았던 지금의 내몽골(Inner Mongolia)에 동이족이 만든 홍산문명(紅山文明)을 발굴해 내고는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인류의 4대 성인(聖人)으로 분류하여 숭앙하는 공자가 동이족이며 그의 제자 맹자도 동이족이라니....
최근 내몽골의 적봉시(赤峰市) 오한기 흥륭와(興隆窪)에서 9천년전 북경의 연산남북(燕山南北)을 중심으로 발전한 홍산문명(紅山文明)이 있고 산동성에는 후이(后李), 북신(北辛)문화 등 8천년전의 동이역사를 증명하는 유물, 유적과 문헌이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다시 말해서 지금부터 6천년 전에 내몽골 적봉시(市) 홍산(紅山)에서 홍산고국(紅山古國-환국)을 세운 것이 환국시대로서 이 환국문화가 홍산문명이며 홍산문화계열은 지금부터 8천년 전 흥륭와문화 - 홍산문화 - 하가점문화까지 발전하였고 이것이 바로 고조선의 문화라는 것이다.그리하여 콧대 높은 중국이 이 지역을 고도(古都)로 중시하여 중국북방 고대문화 국제학술연토회를 적봉시에서 개최했으며 이 문화가 동이족 토착인의 문화로서 동방고대 문화의 발원지이며 세계문명의 창시문화라고 지나의 학자들이 공인하였다.
동이족의 홍산문명은 이집트나 바벨론문화보다 근 2천 년을 앞선 세계 태초의 문화였으나 그 발견이 늦어 세계사에 아직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홍산문명은 절대로 신화나 전설이 아니며 9천 5백 년 전 사람의 손으로 가공한 옥월(玉鉞)이 오한기(敖漢旗) 천근영자(千斤營子)에서 발견된 이래 8천 년 전의 흥륭와(興隆臥)문화로부터 시작한 유물과 유적은 이미 중국 박물관에 고이 보존되어 있고 상고의 문헌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었다고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환국시대의 14대왕 치우의 묘를 상고 문헌에 의하여 현재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남왕진(南旺鎭)에서 발견하였고 산동성 미산현(微山縣)에는 환국시대 5대 왕인 태호의 아들 복희(伏羲)의 묘가 있고 인론지시(人論之始)라는 글이 있으며 지금은 신령을 모시는 절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호남성 형산시(衡山市)에는 동이족인 소전지자(小典之子) 신농(神農)의 묘가 있고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는 문장에 그 역시 절당이 되어 있고 강소성 운운항(運雲港)에는 신라촌(新羅村)과 신라정(新羅井)이 있고 천하제일서(天下第一書)라는 글이 있는 장군애암(將軍崖岩)에 2백평방미터의 암화(岩畵)에는 5천년전의 천문기상의 연구와 고대의 각종 석각이 보존되어 있으며 광동성 광주(廣州)에는 3대 단군의 현손인 번우씨(番雩氏)가 세운 번우국(番雩國)이 지금의 번우시(番雩市)로 되어있고 광주에서 2백km를 지나서 신흥현(新興縣) 육조당(六朝堂)에는 동이조상의 영상(靈像)을 모시고 있는 신라촌(新羅村)과 양씨촌(楊氏村)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비록 화하족(華夏族)화되었으나 자신들을 고려(高麗)라고 한다는 것이다.
산동성 환대시(桓臺市)에서 발굴된 가림토(加臨土)문자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문자는 탄소연대가 약 3천8백5십년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천년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지금도 이 지방의 사람들에게 ‘조상이 누구냐’ 물으면 고려(高麗)라고 한단다. 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수천 년 전의 유물과 유적이 중국학자들의 노력으로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외곽지역은 물론이고 중국의 본토도 우리 동이족의 안마당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동이족의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음을 중국학자도 공인하며 동이의 역사는 구려(九黎)의 문명으로 감숙성 돈황(燉煌)과 금악(金岳), 태백산(太白山), 흑수(黑水), 요녕성, 서납목하(西拉沐河)또는 서요하(西遼河), 서압록강(西鴨綠江)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다.
동이족의 역사는 중국역사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므로 중국 문화부의 비준으로 ‘동이고국 전문위원회’가 산동성 제령시(濟寧市)에 설치되었으며 이 제령시에서 동이고국사 연토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상고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 조상들의 영특함과 용맹함과 우수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고대사 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이 방면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고조선과 단군의 실체와 역사를 중국의 사료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 온 심백강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가 이번에는 동이가 고조선의 뿌리이며 동양문화와 사상의 중심이었다는 자료를 발굴해 낸 것이다.그의 연구에 의하면 동이족은 9천년 전 부터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토착인으로서 옛날에는 구려(九黎)라 하였고 4천 7백 년 전환국시대의 14대왕 치우의 전성시대부터는 동이족을 치우족, 삼묘(三苗)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BC. 8천년 어간에 중국을 휘몰아치던 동이족은 제1차 치우(蚩尤)와 헌원(軒轅)의 영토 분쟁, 제2차 주(周)의 은(殷)왕조 침략, 3차로 동이와 은(殷)왕조의 전쟁 등 민족의 내부분열과 동족상전으로 화하족에게 멸망을 면치 못하였고 차츰 화하족화 되었던 것이다.청운의 꿈을 꾸며 태평양을 건넌 대한의 건아들이 우리의 선조들이 이미 발을 밟았던 이 땅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잠시 방황할 때 하는 것이 낚시질인데 낚시에 관한한 우리는 강태공을
빼놓고는 낚시를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유명한 낚시에 있어서의 전설적인 대가 강태공의 성은 여(呂)씨, 이름은 상인데 그가 바로 동이족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중국이 천하통일을 하지 못하고 전국이 수십수백으로 나누어져 싸움질을 하던 강태공 시대 배경은 은나라 말기였는데, 은나라 말기에는 주나라가 가장 막강했었다. 은과 상의 강력한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강태공은 영구성을 쌓고 국명을 제라 하였다.
끊임없는 은과 상의 침입을 9성 동맹으로 막아낼 수 없어 인류최초의 병법서인 육도 삼략을 저술한 후 낚시에 들어간다. 낚시로 소일을 하던 중, 주무왕의 초청으로 주나라에 들어가지만, 내심은 주무왕을 이용하여 은을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고, 644년 결국 강태공은 은 정벌에 성공했다. 그때 나이 70이었고, 중국측 사기에는 주무왕의 스승으로 은-주 혁명의 일등 공신인 태
공망 여상은 동이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NJ Fort Lee 한사랑교회 담임목사)
북경 청화대학 안 공자상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