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한국최초 몽공유학생...선교사로 교회개척 사명
자비털어 몽골최초 탁구교실 만들어...10년간 국가감독 연임
몽골 도시의 청년들에게는 스포츠는 물론이고 놀거리가 별로 없다. 시골로 가면 말이라도 타며 젊음을 발산하겠지만 도시의 청년들은 그러지도 못한다. 고작해야 먼지 나는 길거리에 방치 되다 시피 세워져있는 다 낡고 삭아버린 당구대가 전부인데 그나마 돈을 내고 해야 하니 그것도 쉽지는 않다. 아니면 돼지 밥통인지 소 위 인지 모르는 동물의 내장에다 헝겊을 씌운 것을 발로 차며 노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연소한 알콜 중독자가 많다. 강의 시간에도 술에 취해서 사고를 치는 젊은이들도 있다. 일 년의 절반이 추운 겨울이고 보니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을 이미 10년 전에 했으며 그것을 직접 실천한 한국인 맹렬여성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강영순이다. 그녀에게 따라 붙는 여러 개의 공식적인(?) 수식어는 그녀가 몽골 국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몽골의 탁구 어머니’로 불리며 몽골 정부로부터 3번의 금정훈장을 수여 받은 민간 외교관으로서 몽골 탁구협회 국가 감독을 10년이나 연임했고 현재는 몽골탁구협회 국제이사로 활동 중인데 그녀가 배출한 몽골국가대표 선수만 20명이다. 특히 히로시마(1994)와 부산(2002) 아시안 게임에서 몽골 국가 대표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수년 전 KBS 2 텔레비전 ‘한민족 리포트’라는 프로그램에서도 방영된 대로 그녀는 몽골 탁구의 대모다. 그녀를 빼놓고 몽골의 탁구를 논할 수는 없다. 한국의 지인들의 지원을 받아 몽골 최초의 민간인 탁구 클럽 ‘솔몽 탁구 클럽’을 설립했다. 그녀의 몽골 이름은 강토야(‘토야’는 몽골어로 ‘아름다운 빛’이라는 뜻이다). 강영순이 몽골 탁구 대표팀 감독 자리에 있은 후 굵직한 변화가 있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위해 모국에 도움을 청했던 그녀의 요청으로 한국 남자 국가대표 출신 박지현 코치(현 예멘 탁구팀 감독)가 대표 선수단을 맡게 된 것이다. 그 뒤 여자국가대표 출신 양영자 코치가 바통을 이어받아 몽골 탁구의 체계를 만들었다.
그녀가 키운 청년 바이야르는 한국에서의 1년 탁구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몽골의 거의 모든 대회를 석권하다시피 하면서 몽골 청소년 탁구의 대명사가 된다. 각종 국제대회 대표도 늘 그의 몫이었다. 96년 러시아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대회에서는 타이완의 창펭룽 선수를 이길 정도로 성장했다. 1991년, 35세의 처녀 강영순은 한국 최초의 몽골 유학생이 되어 징기스칸의 땅을 밟았다. 세계에서 두 번째 골수 사회주의 국가였던 몽골이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개방) 직후 2년이 채 안된 때였다.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아시아의 중앙고원에 둘러 쌓인 채 70 년간을 신비의 나라로 지내 온 몽골로 그녀는 시집을(?) 간 것이다. 탁구를 통해 한국과 몽골을 잇는 다리가 되고 있는 강영순씨. 몽골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토야
’라고 부른다. 지난 2002년 아시안 게임엔 최연소 팀을 최초로 구성하곤 자비를 털어서 출전했다. 몽골정부가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자금으로 쓰라고 어머니가 준 서울의 집을 팔아서 경비를 댄 것이다.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인 몽골에서 탁구는 안성맞춤인 실내스포츠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비를 털고 지인들의 지원을 받아 몽골 최초의 민간인 탁구 교실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가르쳐 국가대표를 만들었고 이들이 지금은 몽골의 탁구계를 이끌고 있다. 서른다섯 살 미모의 여성이 늦깎이 몽골 유학생이 된 후 그녀가 몽골에 도착하면서부터 가시밭
길과 같은 고난이 시작되었다. 감시원이 쫓아다녔고 전화기에는 도청장치를 했다. 수상한 인물로 본 모양이었다.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가게도 없고 물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나라였다. 그녀보다 십년이나 늦게 몽골에 들어 간 나는 당시의 형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수돗물이라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끊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새 물이 나올 때 마다 연탄을 풀어 놓았는지 시커먼 물이 나오는 것이다. 샤워를 하는 데 갑자기 시커먼 물이 나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험난한 유학생활을 한지 불과 10일 만에, 그녀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선교사라는 사실이 발각 된 것이다. 상황은 위급했다. 당장 추방당할 위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당한 시기에 그녀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셨으니 한국에 있을 때 그녀는 서울시 탁구대표 선수였었다. 연속 3년 우승이라는 영광의 매달을 받기도 한 매우 우수한 탁구선수로서의 화려한 이력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마침 몽골 국립대학 체육학과 교수가 은퇴를 하게 되어 그녀가 그 자리를 메꾸게 된 것이다. 6년간 물도 없고 난방도 되지 않는 초라한 빈민가에서 그녀는 선수들과 함께 살면서 탁구를 가르치면서 은밀하게 전도했다. 건물을 짓고 싶은데 건축 자재가 없어서 러시아 군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장을 뒤지며 직접
자재를 만들어내어 마침내 교회당 겸 체육관을 짓기도 했다. 그야말로 눈물과 땀과 기도로 지은 것이다. 눈물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그녀의 무용담은 남자인 나로 하여금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감동의 스토리였다.
그런 그녀가 작년에 징기스칸의 고향인 헨티에 교회를 세웠다. 징기스칸의 고향에 교회를 세운다는이야기는 몽골의 성지를 교회화 하겠다는 이야기이다. 몽골국민의 의식을 바꾸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의 결과이다. 몇 시간을 털털거리며 비포장도로를 여행하기가 그 몇 십번이던가? 그녀는 마침내 무릎과 눈물로 교회당을 지어 헌당식까지 치렀는데 그만 지난여름 강풍으로 폭삭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 새 교회당을 짓기 위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지난 93년말 몽골 울란바토르에 세워진 문힝 암드릴(영원한 생명) 교회는 ‘핑퐁 선교’의 첫 열매였다. 자신의 제자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변신한 학생들의 공이 컸다고 한다. 그녀는 이후 교회 몇 곳을 더 개척했고, 교회사역 일체를 현지인 교역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이양한 것이다. 몽골의 ‘빛’이라 불리고 또 스스로 몽골 아이들의 ‘빛’이 되고 싶은 몽골의 탁구 엄마 강영순 선교사.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국민의 90%가 라마교를 믿는 땅 몽골에서 그곳에서 선교를 펼치기란 쉽지 않았다.
미모에다 총명한 그녀는 왜 몽골로 갔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녀는 독신이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5년 동안 애틋하게 사랑을 키워온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는 결실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마침내는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남겨진 커다란 실연의 상처는 결국 산에 올라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산에 올라가 정말 죽을 각오를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더라구요. 그 날 주님은 제게 선교사의 길을 보여주셨어요. ‘보내주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어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용기와 단 한 번의 결단이 필요하지만 산다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 주님이 깨닫게 해주셨구요.”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자신이 선교사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교사로 택해 주셨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이미 몽골 땅에 교회를 개척하여 현지인들에게 교회를 이양시킨 그녀는 “중국 내의 내몽골과 러시아 내의 브리아뜨 몽골 그리고 야쿠트 부족 등 흩어진 몽골 족속을 위해서 미션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고 현지인들을 트레이닝 시켜 동족을 품고 동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조심스레 소원을 이야기하며 오늘도 고집스럽게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가겠다고 확고한 다짐을 들려준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도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이다. 탁구 선교 사역과 흩어진 족속을 위해 준비 중인 교회개척 사역에 귀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기도한다.
<포트리 한사랑교회 목사>
강영순(토야 강)씨기 징기스칸의 고향 헤비에 지은 교회가 올 여름 열린 몽골의 국경일이요 최대 명절인 나담 축제기간에 몰아닥친 강풍으로 반파되었다. 그 교회는 한국에서 1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교회이자, 강 선교사가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팔아서 세운 교회이다. 무너진 예배당을 겨울이 오기 전에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이 기도와 더불어 건축현장에서 직접 봉사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