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또 하나의 신드롬 ‘발마니아’

2009-09-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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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패션피플을 사로잡은 ‘발망’

▶ ‘파워숄더 재킷’ 유행의 발원지

최근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로 거듭나는 중
기품 가득 여성적이면서’
개성있는 ‘엣지’ 표현

비틀즈 매니아들에게 성석제의 소설 제목처럼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길가다 우연히 들른 중고 LP샵에서 그들만이 알 수 있는 희귀본 한정판을 집어드는 순간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기막힌 횡재 수보다 더 잡기 힘든 것이 바로 한국 남자들이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나 아줌마들의 출산 스토리에 맞먹는 양과 흥분의 강도로 패션에 관한 수다를 떨 기회와 마주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바닥 보이지 않는 패션 수다를 떨 수 있는 골수 패셔니스타 둘이 만날 찬스란 비틀즈 매니아 두 명이 우연히 만날 기회보다 더 희박하지 싶다. 이는 패션 바닥이란 게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중세 서양사처럼 그 양도 방대할 뿐더러, 시즌별로도 변덕이 죽 끓는지라 1년은 고사하고 분기 별로 새로운 트렌드가 교차하고, 신진 디자이너가 혜성처럼 나타나는가 하면 어제의 스타가 오늘의 실업자로 전락하는 다이내믹한 필드여서 패션 기본 지식에 복식사는 물론, 기호와 안목까지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트렌드 예지능력까지 갖춰야 해, 웬만한 ‘꾼’들이 아니고서는 수다의 밑천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몇몇 이름 있는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한 패션 주류에서 벗어나 꽤 오래 전부터 그 저력을 드러내 왔던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를 거점으로 한 로열 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디자이너들이 쏟아지고, 유럽에서 활동하는 역량 있는 아시안 신인들까지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디자이너 이름에다 브랜드 네임까지 제대로 발음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 이상 유명 브랜드(일명 명품)를 꿰차고 있는 정도로는 이 바닥 수다에 명함 내밀기조차 힘들게 됐다.

이런 21세기 럭서리 하이 패션의 다양화, 세분화는 패션을 그저 입는 옷이 아닌 이를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 기호로 자리매김하게 해 이미 죽은 롤랑 바르트를 관속에서 일으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논해야 하는 시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패션을 단순한 옷 입기나 과시가 아닌 하나의 문화체계로 받아들이는 감각 있는 영 피플들에게 패션은 이제 거대한 철학 체계가 돼버려 이 철학 체계 안에서 그들만의 질서와 세계를 구축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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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발망을 확실한 핫 브랜드로 등극시킨 데님 밀리터리 룩 자켓. 마이클 잭슨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재킷은 2만달러가 넘는 고가임에도 품귀현상을 보일 만큼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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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머스트 해브 아이템 0순위에 오른 파워 숄더 블랙 가죽 재킷. 뾰족하게 솟은 발망 트레이드 마크 숄더에 몸에 꼭 맞게 피팅 된 가죽 재킷은 이미 패셔니스타들의 로망이 됐다.


■ 발망, 부활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가장 수다를 떨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디자이너는 발망이다. 패션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어, 어디서 들어봤더라?’라고 반문할 터이고 그 아닌 대부분의 이들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봤을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발망. 1945년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건 부틱을 연 뒤 발렌시아가, 크리스천 디올과 함께 파리 패션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다 1982년 작고한, 일견 이 ‘올드한’ 디자이너 브랜드가 21세기 하고도 2009년을 뜨겁게 달궜다 하면 좀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다.

신생 브랜드라고 알고 있는 이들이 더 많을 만큼 피에르 발망 사후 침체일로에 있던 발망을 부활시킨 이는 현재 발망의 수석 디자이너 프랑스 출신의 크리스토프 데카르넹(Christophe Decarnin). 발망 사후 이 브랜드는 미국 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가 인수했지만 20년이 넘게 이렇다 할 빛을 못보다 2005년 데카르넹을 영입한 이후 발망은 미우치아 프라다를 제치고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바닥에 종사하는 이들 쳐놓고 2009년 패션계를 논하면서 그의 이름을 피해가는 게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데카르넹은 지난 시즌 화려하면서도 페미니즘 가득한 블랙 밀리터리 룩 재킷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후, 스트릿 패션은 말할 것도 없고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디자이너들도 슬금슬금 그의 디자인을 베끼고 있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왜 발망인가

지난 시즌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지난 봄 파리에서 열렸던 파리 컬렉션 중 발망의 무대는 암표가 자그마치 2,000달러에 거래됐을 만큼 데카르넹이 이끄는 발망은 평론가들과 패션 피플 모두에게 절대적인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그의 지난 시즌 의상을 쫙 빼 입고 컬렉션이 진행되는 캣워크 주변 맨 앞줄에 앉은 이들을 패션 피플들 사이에선 발마니아(Balmania)라고 부른다는데 이를 한번 곰곰 생각 해보길, 그 어떤 유명 디자이너들도 이와 같은 단어를 창출해 낸 적은 없었다. 그만큼 최근 현재 어제가 오늘 같던 잔잔한 패션계엔 발망의 열기는 가히 신드롬에 가까울 정도다.

이처럼 패션계가 데카르넹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그가 피에르 발망이 추구했던 여성적이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스트릿 룩을 적절하게 가미한 그만의 엣지를 성공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밀리터리 룩 재킷 외에도 에시드 워싱 진(acid washing jean) 역시 그가 내놓은 트렌드인데, 이미 눈치챘겠지만 꼭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알고라도 있었던 듯 그는 80년대의 향수를 그 시대 대표 아이콘이었던 잭슨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듯한(?) 거리 패션 느낌 물씬 나는 그의 의상은 오트 쿠튀르 평균가를 호가한다. 이미 발망 컬렉션을 취급하는 인터넷 부틱을 통해 가격을 확인한 이들은 알고 있듯이 그의 진 한 벌은 2,000달러를 가볍게 넘기며 스커트 한 장에 8,000달러에 육박한다. 이런 단품들이 이럴진대 짐작했듯이 재킷과 코트는 ‘당연하다는 듯’ 1만달러를 훌쩍 넘긴다. 처음엔 동그라미를 잘못 센게 아닐까 눈을 의심하게 되는 그의 의상 가격은 그래서 평범한 ‘직장녀’들에겐 평생 꿈조차 꾸기 힘든 윈도 속 ‘작품’으로 박제 돼 버릴런지는 모르겠다. 오호 애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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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망 수석 디자이너 크리스토프 데카르넹.

■ 발망 유행 아이템은

이미 가을 패션을 준비하는 모든 매체들이 호들갑스럽게 보도했듯이 올 가을 아키텍처 숄더, 즉 파워 숄더 재킷이 유행의 진원은 바로 이 발망이다.

아직까지 ‘파워 숄더 재킷이 뭐야?’라고 난감해 하는 이들이라면 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의 히로인 윤은혜의 극중 의상을 보면 된다. 여기서 그녀가 입고 나오는 어깨가 뾰족한 파워 숄더 재킷은 100% 발망 컬렉션이다. 윤은혜는 극중에서 원 없이 발망이 이번 시즌 컬렉션에 출품한 모든 디자인의 파워 숄더 재킷을 입고 나와 발망 재킷을 놓고 웹서핑만 했던 트렌드 세터들을 기함하게 했다.

그런데 이처럼 분명 이 뾰족하게 솟은 어깨를 가진 재킷의 유행은 점쳐졌지만, 패션에 관심 있는 이들은 이미 알고 있듯 고급 백화점은 물론 럭서리 브랜드에서도 이 파워 숄더 재킷을 찾기란 쉽지 않다.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모름지기 유행이라 하면 유명 브랜드에서부터 컨템포러리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아이템들이 쫙 깔리게 마련인데 이 뾰족 어깨를 가진 재킷을 찾기란 참으로 힘들다. 게다가 패션 매거진들이 앞다퉈 소개했던 그 완벽한 피팅을 자랑하는 블랙 재킷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정말이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은 명료하다. 바로 패션 잡지들이 앞다퉈 보여줬던 그 재킷은 모두 발망의 이번 시즌 컬렉션들이라는 게 답이다. 새틴 트림의 턱시도 디자인에서부터 가죽 재킷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일관되게 발망의 이번 시즌 컬렉션이라는 것이다. 즉 그 뾰족한 파워 숄더 재킷을 구입하려면 발망 매장 아닌 다른 곳에서는 현재까지는 구입 불가능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처럼 이례적인 열기에도 불구하고 데카르넹은 패션 매거진이나 언론에 공개적인 인터뷰나 그 흔한 화보 촬영 한번 한 적이 없다. 그의 컬렉션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자신의 열정을 주체 못하는, 그리하여 존 갈리아노보다 더 뜨거운 사내일 듯 싶은데 웬걸. 무색무취에 수줍음까지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로는 세계 둘째가라면 패션 피플들도 무슨 콩깍지가 씌였는지 이런 그를 두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그의 캣워크에 다 담겨 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할 정도라고 하니 그에 대한 애정은 이제 가히 컬트 수준에 이른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여기에 그 누가 어떤 반박이나 사족을 덧붙일 수 있을까. 마크 제이콥스에 대면 결코 잘 생겼다 할 수 없으며 칼 라거펠트의 카리스마도 찾아 볼 수 없는 그이지만 영혼까지 흔들어 놓는 블랙 파워숄더 재킷과 그린 크리스탈 칵테일 드레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눈 하나에 콧구멍이 3개라 한들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 뒷줄에 슬그머니 발 한 짝을 걸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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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파리 컬렉션이 끝난 후 캣워크에 섰던 모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입은 의상은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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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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