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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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영 목사의 몽골체험기(6) 징기스칸의 고향 -바이칼 호(湖)

2009-08-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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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역사 간직한 ‘시베리아의 진주’

▶ 한(韓)민족의 시원지(始原地)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바이칼은 우리의 뿌리와 관련해서 예부터 끊임없는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일찍이 바이칼 기행문을 발표했다. 최근의 과학은 보다 객관적으로 우리민족의 시원이 바이칼에 있었음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다. 유전과학의 발달은 화석상태의 돌멩이에서 DNA를 추출하여 현재 전 지구상에 있는 인류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면서 인류의 기원과 인류의 이동경로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으며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
하면 할수록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바이칼 호수는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깨끗하며 가장 차가운 호수이다. 한 여름에도 1분 이상 발을 담글 수가 없으며 죽은 물고기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을 정도다. 경상남북도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호인데 40m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다. 그 수정같이 맑은 물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민물 물개와 철갑상어 그리고 내장이 들여 다 보이는 투명한 물고기 골로미양카가 사는 곳이다. 바이칼은 그 자체로서 이곳에만 있는 1,500여종의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진화박물관이자 원시생명체 연구소이기도 하다.

바이칼의 토착 생물들 중에는 지형이 급변하는 바람에 격리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2,500만년 동안 이 호수 안에서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들이야 말로 바이칼이 과학자들에게 인간과 지구의 역사의 비밀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며 우리가 바이칼을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서 최근의 석학들인 단재 신채호, 육당 최남선, 봉우 권태훈 선생등에 의하면 우리 겨레의 얼의 진원지요 우리 민족 문화의 발상지요 조상들의 활동무대로 가장 유력시 되는 곳이 바로 바이칼 호수 지역인 것이다. 그 근거로 조선(朝鮮)이라는 말의 어원을 들 수 있으리라. 우리는 그동안 배워오기를 아침 조(朝),빛날 선(鮮)을 해석하기를 ‘아침 해가 빛난다’에서 ‘아침 해가 빛나는 나라’라는 의미가 조선이라는 말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채혁 교수의 최근의 연구 논문(2001년)에 의하면 바이칼 근방의 시베리아 벌판에 우뚝 서 있는 대흥안령 산맥 북부 오룬춘을 답사하면서 선(鮮)이 순록의 겨울 주식인 이끼, 즉 선(蘚)이 나는 산 인 것을 시경(詩經)을 통해 입증한 것이다. 또 조선(朝鮮)의 ‘조’자는 아침 ‘조’자가 아니고 ‘찾음’을 뜻하는 글자인 것이 흥안령 선비족 기원지와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를 현지 조사해서 찾아낸 것이다. 또 중국어 사전을 보면 ‘조선’이 이끼(蘚)가 나는 새 땅을 찾아다니는 ‘순록 유목민’을 의미하는 시베리아 원주민의 토속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이끼가 많은 지역을 찾아서 서시베리아에서 동 시베리아로 이끼의 길을 찾아서 태평양이 있는 동쪽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바이칼 호수가 있는 지역이 바로 시베리아인데 조선, 부여, 고구려, 거란, 발해, 그리고 여진과 몽골등은 이 시베리아에 역사적 태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몽골의 수미야 바타르 교수는 몽골 남쪽의 동리인 고올리칸 훈촐로이의 상(像)이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해모수의 아들, 58-19B.C. 재위 37-19B.C.) 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몽골어로 고올리족과 고리(槁離, 고려) 그리고 바이칼호 올콘섬을 시조지로 하는 코리족은 모두 몽골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들이 같은 혈통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최근의 DNA
조사는 이들의 견해를 입증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시원지를 바이칼로 삼는데에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칼로 오기 그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 있었으며 어디에서 이곳으로 왔느냐 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데 이것은 그 기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제의 강점 기간에 이루어진 왜(倭)의 만행(蠻行)-단군 말살 정책-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우리 조상들의 뿌리에 관해서 지극히 관심이 없는 족속이다. 이것은 정말 반성할 과제이다. 왜(倭)는 그들의 뿌리를 연구하는데 매년 100억 이상을 투자한다고 한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일제가 조선을 자기들의 영구한 식민지로 삼으려고 할 때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는 사실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강점할 당시 그들의 역사는 겨우 기원 후 1,700년인데 비해 우리 조선은 기원전 4,200년이나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보다 2,000년 이상 앞서 있는 조선의 상고사를 말살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조선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위원회>였고 그 수괴 되는 자가 이마니시류(今西龍, 그의 이름을 풀면 지금 서쪽에 있는 마귀<龍>이다. 계시록
20:2) 동쪽에 있는 자기 나라 일본을 떠나 지금 서쪽 한국으로 와서 마귀 짓을 하고 있으니 이름 그대로 금서룡(今西龍)이다. 그는 그렇게 마귀 짓을 하다가 급사했다. 당시 육당 최남선은 단군조선이 ‘조선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금서룡과 한인 어용사학자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그 뿐 아니라 교활한 일제는 단군을 말살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것으로 판단했다. 민족의 시조가 없어지는 것이니 한민족은 단군을 하나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을 잃고 그 기가 꺾이며 민족이 분열되는 것을 노린 것이다. 이를 위해 1920년대부터 우리의 역사를 날조, 축소, 왜곡 그리고 부정하는 작업을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시작했고 가장 먼저 우리나라 전국각지에서 단군관련 역사책을 모두 수거하여 소각한 것이다. 총독 데라우찌는 헌병들을 동원하여 전국의 향교, 책방, 서원, 개인집을 뒤져서 우리 민족의 귀중한 사료들을 불태운 것이다. 1930년 8월 22일 총독부 중추원 회의에서 조선사편수회는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은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망언을 하며 단군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금서룡은 그의 논문 단군고(檀君考)를 발표한 후 2년 뒤 57세로 급사했다.)

그런데 1910년 이전인 구한말의 학부가 검인정한 고유상의 역사교과서 <오천년 조선역사>의 제 1편 상고사 제 1부의 조선의 창국(創國)을 보면 “아동(我東) 유국시대(有國時代)가 단군으로부터 시(始)하니라‘ 로 시작하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제 1장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선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인간이시라....(이상 알이랑 민족,유석근 저 인용)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역사의 시작은 단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할 것은 단군의 신격화이지 단군의 실존을 무조건 부정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이 과연 역사의 인물이라면 그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단군은 어디에서 왔으며 단군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단군의 개국정신과 몽골인의 천손(天孫)사상은 그렇게 같은 것인가? 어찌하여 단군의 8조 금법은 구약성경의 10계명과 그렇게 같을 수가 있는 것인가? 제천신앙(祭天信仰), 천제(天祭), 천산(天山,)개천절(開天節),천시(天市),개천시교(開天施敎), 천훈(天訓),신훈(神訓), 천궁훈(天宮訓),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등 단군의 개국과 더불어 하늘(天) 과 신(神)과 관련된 말이 이렇게 많을 수 있는가? 우리의 주변국가인 지나나 왜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이렇게 신기한 말들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

바이칼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징기스칸은 경치와 풍광이 빼어나고 기가 센 곳이라고 여겨지는 바이칼의 핵인 올콘섬을 생전에 틈틈이 찾아 기도와 명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세계를 경영할 전략을 수립했을 것이리라. 세계경영이라! 진정한 사나이라면 한번 품음직한 꿈과 대망이 아닌가? 청년이여 야망을 품어라! 대망을 품으면 그 대망이 당신을 그 곳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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