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2009-03-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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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아, 재밌냐?

뉴저지의 마지막 날, 맨해턴 거리를 구경하러 비가 내리는 저녁 길을 나섰다. 말로만 듣던 뉴욕의 밤거리는 정말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거기다 날씨는 어찌나 추운지 하수구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과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이 거리를 잔잔하게 깔고 있다. 높은 빌딩을 목을 쭉 빼고 보면서 “승욱아, 저게 말로 듣던 앰파이어 빌딩이래. 여긴 브로드웨이, 센트럴팍도 지나고 있어 우와~” 난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속에 마치 내가 있는 듯 흥분해서 승욱이에게 떠드는데 승욱인 전혀 감동도 없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둘러 LA로 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6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니 먹을 것도 든든히 먹이고 비행기 타기 전에 승욱이가 좋아하는 에스컬레이터도 실컷 태워주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앉으니 익숙한 자세로 안전벨트를 매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 “욱아, 엄마가 너 때문에 너무 좋은 여행을 한 것 같아. 고마워” 그 후로 두 시간은 정말 잘 왔다. 그런데 비행기를 탄 두 시간 후부터 이 승욱 어린이의 괴상망측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창가에는 미국 아저씨가 타고 중간 자리에는 승욱이가 타고 복도자리에는 내가 앉았는데 승욱이가 들고 있던 장난감이 떨어져서 줍는 과정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미국 아저씨의 신발 위 그리고 바지 밑에 공개된 살에 털이 북실북실 난 것을 만지게 되었나 보다.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는데 계속해서 “히히히, 키키킥, 흐흐흐, 흐이힉.” 너무 행복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결이다 보니 애가 울지 않고 뭔가 재밌는 일을 하고 있나보다 생각을 하고 난 계속해서 취침. 한참을 자다가 눈을 번쩍 떠보니 아, 승욱이가 옆에 앉은 아저씨의 바지를 걷고 털을 하나하나 쓰다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승욱! 너 뭐 하는 거야” 너무 민망해 하는 아저씨와 나 그 옆에 재밌어 죽는 우리 아들, 거의 한 시간을 옆에 앉는 미국 아저씨의 다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 빨개져서 아저씨에게 이러쿵, 저러쿵 설명을 늘어놓았다. 표정 없는 미국 아저씨 열심히 앞에 영화만 보고 있다. 승욱이는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며 옆에 앉은 아저씨의 다리털을 만지려하고 난 손을 붙잡고 그렇게 나머지 3시간을 왔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싶었다. 아들아, 옆에 앉은 아저씨 다리털 만지는 것이 뉴욕의 밤거리를 구경하는 것보다 재밌더냐? 엄마는 너무 민망했다. 엄마가 발모제를 몸에 발라서 털을 만들어 주던지 해야지 원, 이런 황당할 데가.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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