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 승욱이 이야기

2008-11-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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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이걸 숙제라고 한 거야? 글씨가 이게 뭐야? 준비물은 미리미리 챙겨야지! 엄마가 언제까지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뒷정리를 해줘야 하는데?” 점점 늘어나는 나의 잔소리에 아이들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숙제를 끝내면 만사 모든 일을 끝낸 양 기세등등해 하는 아이들 때문에 매일 옥신각신이다. 뭐 그다지 급할 게 없는 아이들의 마음과 항상 급한 나의 마음이 언제나 충돌이다. 숙제만 끝내면(가끔 숙제를 끝내지 않아도) 나가서 뛰어 노느라고 집구석에 얌전하게 있는 녀석이 없다. 자전거를 타거나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립스틱(트위스트 모양의 롤러블레이드)이란 것을 타느라고 밥 먹을 때나 들어오니 뭔가 기선제압에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다.

아이들 셋을 불러놓고 훈계에 들어간다. 학교 갔다 와서 할 일, 각자가 할 일, 저녁시간에 할 일, 주중과 주말에 할 일을 다 설명해 주고 얼마 있으면 성적표를 받아올 아이들에게 미리 엄포를 했다. “매일 이렇게 놀다가 성적 나쁘게 나오면 알지? 그러면 용서가 안 되는 거 명심해!”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별로 긴장하는 것 같지도 않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웬일인지 아이들이 방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다. 쥐죽은 듯하게 다들 책을 읽느라고 삼매경이다. “어라? 이게 웬일? 너희들 이제 공부 열심히 하기로 결심한 거니? 진작 좀 결심하지. 쨔슥들…” 애들의 귀여운 모습에 괜히 흐뭇해하며 저녁을 먹고 방에 있는데 한 녀석씩 내방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있다. “왜? 뭐 사인할 거 있어? 학교에서 뭐 준비해 오래?” 대표로 우리 큰아들이 떠밀려 들어온 것 같다.

긴장한 얼굴로 “엄마, 나 뭐하나 물어봐도 돼? 내가 뭐 물어보면 엄마 화 낼 거지?” “아니, 엄마가 왜 우리 아들에게 화를 내니?” “엄마, 엄마는 아들이 중요해 학교 성적이 중요해?” ‘이런. 이 녀석들이 정말 성적표를 받아왔나 보군. 뭐라고 대답하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천진난만 아무 잘못이 없는 얼굴이다. “엄마는 아들이 더 중요해. 근데 왜?” “엄마, 진짜 아들이 더 중요하다고 했어. 나중에 다른 말하지 마.” 하고 잠시 후 종이를 잔뜩 들고 와서 사인을 요구한다. 뒤이어 우리 조카들도 줄줄이 따라들어 오는데 하나 같이 당당한 얼굴이다.

‘헉~ 이런 이런… 이걸 점수라고 내민 거야? 성적 받아온 종이를 넘길 때마다 허걱 소리가 절로 난다.’ “야~ 이것들 진짜. 이게 뭐야? 이게? 학교에서 안 배운 것을 테스트했니? 도대체 이걸 점수라고 받아온 거야? 엄마가 평소 뭐라고 했어. 매일 밖에 나가서 놀더니 이것 봐. 바로 점수가 이렇잖아. 사인 못해 줘.” “엄마, 엄마가 방금 학교 성적보다 아들이 더 중요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래?” “그래, 아들이 더 중요해. 그런데 사인은 못해줘. 엄만 몰라”

쑥덕쑥덕 아이들이 문밖에서 단합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에 더 잘한다고 그래. 이모 많이 화났나 보다. 그러니까 매일 너무 놀아서 그런 거잖아. 이제 많이 안 논다고 약속하자.” 우르르 내방으로 세 녀석이 들어온다. 날카롭게 째려보는 나에게 “다음 테스트는 무조건 성적 올릴게. 그리고 학교 갔다 오면 숙제도 잘 끝내고 책도 미리 읽을게.”

“오늘 사인은 해줄 테니까 내일부터 엄마와 이모가 시키는 대로 할 거라고 약속해.” 사인을 해준다는 말에 솔깃한 아이들이 무조건 말을 잘 듣기로 약속하고 사인을 받아갔다.

다음날부터 스파르타 훈련에 들어가기 시작이다. 물론 승욱이도 예외는 없다. 주말에 집에 와서 피아노시간이나 간식시간이나 이동시간에 아주 무섭게 나름대로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얼마 후에 한국을 가야 하는 내가 아이들 때문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없어도 아이들 스스로 뭐든 할 수 있게 하려고 하니 자꾸 마음만 앞선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목소리와 말투도 거칠어진다. 아이들을 놓아두고 집을 거의 비워 본 적이 없어서 난 자꾸 마음이 불안해진다. 하루에도 여러 번 아이들 때문에 한국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 또 고민 중이다. 오늘도 애들에게 스파르타식 교육은 계속되고 있다.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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