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2008-10-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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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친정엄마가 심장수술을 결정한날 늦은 저녁, 집에 도착해서 메일박스를 열어보니 엽서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귀하의 집 경매날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엉? 이건 뭔 엽서지? 자세히 읽어보니 집주인이 은행이자를 밀린 것 같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경매관련 엽서가 하나둘 날아 오기 시작하는데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아직 렌트가 몇 달 남아 있는데다가 친정엄마가 누워계시니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엽서에 대해 물어보니 은근 이사를 빨리 나갔으면 하는 눈치다. ‘아픈 엄마를 모시고 이 더위에 어디로 이사를 가지?’ 항상 힘든 일은 겹쳐서 오는 통에 아주 돌아버리겠다.

방 두칸짜리 콘도가 너무 비좁아 애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살고 있었는데 이참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을 하고 집을 알아보고 있다. 에고고. 집값은 5년 전 가격으로 떨어지고 있다는데 렌트비는 천정부지로 올라가 있는 건 웬일이지? 우연히 마켓을 가다가 길거리에 나와 있는 렌트 간판을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마침 집이 비워지는 날짜와 이사할 수 있는 날짜가 맞아서 가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계약서 작성.


그런데 이삿짐을 어떻게 꾸리나.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짜 짱~가 엄청난 기운이~~~ 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믿음의 친구들이 달려왔다. 이사하는 날 아침은 우리 식구들보다 도우러 오신 분들이 더 많았다. 다들 열심으로 짐을 날라준 덕분에 일이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이사온 집이 산 밑이라 주변에 토끼도 많고, 아이들 자전거 타고 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아이들은 벌써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열심으로 놀고 있다. 역시 우리 애들은 적응력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하지만 그 중 한 녀석은 아직도 적응을 못해서 거실에 엎드려 있다.

“승욱이, 아직도 맘에 안 드는 거야?” 손을 잡고 위층에 있는 침대에 눕혀주니 엄마 냄새인 것을 감지했는지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이다. 벽을 더듬으며 승욱이 혼자만의 공간 익히기를 하고 있다. 가끔 길을 찾지 못하면 징징 소리를 내긴하지만 몇 발자국 앞에 무엇이 있는지 나름대로 계산을 하며 걷고 또 머릿속에 기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를 그렇게 온 집안을 샅샅이 더듬고 다녔을까. 이제야 얼굴에 안심하는 빛이 역력하다.

새로운 집에 적응할 만하면 이사를 하니 승욱이가 무지 헛갈리나보다. 그래도 기특한 것이 언제나 이사온 날 바로 새집에 적응을 하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승욱이는 집안에서 다친 적이 없다. 나머지 세 아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2층에서 뛰어내려오면서 자빠지고 거꾸러지고 넘어지는데 승욱이는 집안에서 층계를 하루에서 몇 번씩 혼자 오르내리고 다녀도 발을 헛디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만큼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다닌다. 또한 집안에 모퉁이를 꺾어 돌아갈 때도 모서리에도 테이블에도 부딪쳐 다치는 일이 없으니 우린 승욱이를 보면서 “쟤 좀 봐. 안보이는 척하는 것 같지 않아?” 두 눈 말짱히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매일 부딪쳐서 다치고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고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치고 난리도 아닌데 말이다.

승욱이 몸에는 부딪쳐서 다친 멍자국이 하나도 없는데 나머지 아이들의 무릎과 정강이에는 오늘도 퍼런 자국이 여기저기 훈장처럼 달아놓았다. “얘들아, 어째 앞 못보는 승욱이보다 못한거냐...”

이사온 집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다. 왜 이리 내 침대가 큰지. 내 침대에 친정엄마, 승혁이,승욱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자던 좁은 집에서 승욱이와 나만 잘 수 있는 방이 생겼는데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하도 집이 좁아서 넓은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 아니 내방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막상 내방이 생기니 끼어서 자던 버릇이 들어서인지 넓은 침대가 오늘 너무 휑하다. 승욱이만 침대를 휘젓고 있다. 함께 자던 형과 할머니가 없으니 괜히 나만 괴롭히고 있다. 이사 온 첫날밤은 승욱이 때문에 밤을 새울 것 같다. 집에 오면 원래 흥분해서 잠을 안자는 녀석이 나하고 단둘이만 누워 있으니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밤새도록 크크큭... 킥킥킥... 깔깔깔...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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