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음악은 즐겁다

2008-08-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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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 기타를 쳤다.
한국 젊은이 중에 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 불리던 70년대 초, 아직 고등학생이던 나는 기타를 배우러 부모님 몰래 음악학원엘 들락거렸다. 종로 뒷골목 허름한 벽돌 건물, 엘리베이터도 없이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면 삐딱하게 담배를 꼬나 문 선생님이 ‘가수 양성’이라는 간판을 걸고 여러 악기를 다 가르쳤다.

요즘 말로 해서 유난히 기타에 필이 꽂힌 이유는 당시 유명 가수들이 나팔바지를 입고 나와서 다리를 흔들어댈 때 한결같이 기타 하나씩은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 학습 참고서 값이라고 속여서 받아낸 자금이 풍부할 리도 없거니와 뭐든 빨리 배워서 한 곡조 꽝 하고 무대로 나가려면 기타가 가장 어울릴 듯하였다.

석달만에 누군가의 고자질로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셨고 곧바로 노발대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로 시작되는 흔해 빠진 일장연설 꾸지람을 들은 뒤에 소위 ‘카수’의 꿈을 접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 배워둔 기타 솜씨로 이후 20대 시절을 풍성하게 보냈다. 수양회, MT, 대천, 해운대, 페리호 타고 떠났던 제주도, 어디를 가든지 어김없이 기타 가방 하나가 덤으로 따라다녔다. 30대가 되어서 내 힘으로 돈을 벌게 되었을 때에는 아주 좋은 기타를 하나 장만해서 심심하면 부둥켜안고 코드를 짚으며 딩다랑 둥다랑 쏠리터리 매앤~ 하며 악을 써보기도 했다.


그때까지였다. 기타를 친 것은. 어느덧 병원을 개업하고 환자를 보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기타는 점점 방구석으로 몰리다가 선반 위로 올라가다가 나중엔 거라지 한쪽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박을 받고 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다시 기타 생각을 한다. 찬양예배를 일부러 찾아가고 헌금송을 부르는 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영성수련회에 참석을 해도 프로그램의 반은 찬양이다. 아름답다. 영혼을 울리는 소리다. 찬양집 가사는 들을수록 마음 속 깊은 곳을 만진다. 그때 기타를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나도 강단으로 올라가 나팔바지 입고 다윗처럼 춤을 추며 노래했을지 모른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사무엘하 6:14).

얼마 전에는 멕시코 교도소에 기타를 전달했다. 현지에서 사역하시는 한인 목사님이 ‘재소자들로 구성된 찬양단을 만들고 싶은데 기타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셔서 여러 분들이 뜻을 함께 했던 것이다. 모여진 헌금으로 기타 10대를 구입했는데 그 다음번 교도소 단기 선교길에 우리들은 크리스천 재소자들이 연주하는 ‘비파와 수금’을 반주로, 목소리 높여 찬양을 했다. 또 한 분은 드럼 세트를 선물하였다.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찬양 받으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12세 된 아들이 친구들과 밴드를 만든다 한다. 아들은 유치원 때부터 드럼을 쳤다. 나처럼 우중충한 뒷골목에서 몰래 ‘삐꾸’를 긁는 것이 아니라 우르르 친구들을 끌고 와서 드럼이 부서져라 냅다 두드려댄다. 천지개벽하는 진동이다. 아래층 마루에 게으르게 누워 자던 털북숭이 쿠키가 온몸을 부르르 진저리치며 귀를 막고 마당으로 내뺀다.
그래도 노래는 즐겁다. 찬양은 그분께 올릴 최상의 고백이다.

김 범 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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