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고 듣는 그 것조차 황홀해

2008-03-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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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는 그 것조차 황홀해

동전을 넣고 희망곡의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레코드를 골라 음악이 나오는 주크박스. 왼쪽은 1949년형 주크박스로 곡당 10센트이고, 오른쪽은 1938년에 제작된 주크박스이다.

보고 듣는 그 것조차 황홀해

마크 레빈슨 HQD 시스템을 연결한 스피커는 높은 키만큼이나 소리가 웅장하다.

유성기 수집가 윤경원씨

오랜만에 햇볕 구경을 한다는 유성기(축음기)에 생소한 크기의 판을 올려놓고 다섯 번쯤 손잡이로 태엽을 감았다. 그리고 바늘을 판 위에 놓으니 사라사테의 ‘로만차 안달루자’가 흐른다. 신기하기 짝이 없다.

LP 레코드가 나오기 전, 초기판인 SP 레코드가 존재했다는 건 언뜻 들었지만 처음 구경했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877년 에디슨이 처음으로 음반을 발명했을 당시의 ‘원통형 음반’이 있었다. 원통에 새겨진 음구가 나팔통이 달려 있는 유성기(축음기)로 인해 음이 재생되어 소리를 낸다는 사실. 음악이 우리의 삶과 함께 성장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는 말 정말 맞는 소리다. MP3가 나오면서 CD마저 골동품이 된 요즘, 추억이 서린 LP판, 아니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초기 레코드판인 SP판으로 음악을 듣는 남자가 있다. 오양수산 윤경원 사장이 바로 그 고리타분한 로맨시스트다.


그 옛날 서강대 시절 원조 ‘킨잭스’ 밴드의 드럼 연주자로, 매니저로 활동하며 음악에 푹 빠졌던 그가 유성기 수집을 시작한 것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다. 애틀랜타 밀워키에서부터 폭동 다음날 LA로 옮겨온 후 지금까지 앤틱 쇼와 LP 쇼, 벼룩시장, 옥션 등 LP와 SP, 유성기가 있다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서강대 시절 원조 ‘킨잭스’밴드 드럼연주자
유학와서부터 앤틱쇼 등 다니며 LP·SP 수집
에디슨 축음기·원통형 음반·‘마스터스 보이스’까지
집안은 유성기 박물관 방불… 명품 음반도
HSPACE=5
아마도 댄스홀 전용 유성기였나 보다. 판을 돌리니 음악소리가 떠나갈 듯하다. 나팔통 아래 가지런히 놓인 원통들이 유성기 초창기의 원통형 음반들이다.

한 달에 두 번 아무리 술에 취해 잠들었어도 새벽 같이 일어나 음반 구경을 가야 직성이 풀릴 만큼 ‘유성기의 웅장하고 깨끗한 음질’에 인이 박힌 남자, 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최초의 축음기 ‘포노그래프’가 나왔을 때부터 1950~60년대 LP시대까지 음반의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남자다.

1차에 2차가 끝나면 으레 술친구들을 끌고 가는 그의 집은 유성기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한번 가본 사람들은 고리짝 유성기와 음반 때문에 술이 확 깨었다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에 도로 취하게 만드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연대별 에디슨 축음기들은 물론 베를리어 그래머폰이 있고, 좀처럼 보기 드문 원통형 음반 유성기, SP판 24개가 수납된 뷜리처 주크박스와 유성기 시대의 명작으로 불리는 빅터 레코드사의 ‘마스터스 보이스’(Master’s Voice·개가 나팔통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림 라벨 때문에 ‘개딱지’로 통한다)까지 원 없이 음악에 빠질 수 있는 곳이다. 거실 역시 대형 스크린-TV가 필수인 디지털 세대와는 거리가 멀다.

펜실베니아 사운드 뮤지엄에서 옛 주인과 작별한 뒤 LA 전자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던 마크 레빈슨 HQD 시스템과 보통 사람의 키보다 훨씬 키가 큰 스피커 2개가 그를 반기고 있다.

“분당 78회전을 하는 SP판이나 45회전의 EP판은 듣는 것만도 황홀하죠. LP 레코드를 듣는 음악 애호가들은 CD는 음폭이 좁아서 꺼립니다. 음악을 듣다보면 소리가 갑갑하게 느껴지거든요. LP판은 50년대 60년대 초에 출시된 레코드가 최고의 음질을 자랑하죠. LP 100장이 나오면 명반으로 분류되는 것이 1%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장인정신이 깃든 판이기에 음질은 비교할 수 없죠.”

<글 하은선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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