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일기-승욱이 이야기

2008-03-08 (토)
크게 작게
넓은… 하지만 너무 좁은…

승욱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곧 승욱이를 위한 미팅이 있으니 시간을 내서 학교를 와 달라는 전화였다. 외부에서 강사가 와서 ‘시청각 장애아동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식으로 강의를 이끌어간다고 했다. 승욱이와 관련된 선생님들 모두가 참석을 하는 정말 말 그대로 승욱이를 위한 미팅이다. 작은 강당에 제일 먼저 난 도착을 했다.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와서 벌써 준비를 한 것 같다. 의자에 앉으려고 하니 “다과를 준비했으니 드세요”라고 누가 말을 건넨다.
처음 보는 사람인 걸보니 외부 강사인 것 같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 자신을 ‘글로리아’라고 소개를 한다. “저 아시겠어요?” 생뚱맞게 물어 보는 것이 나를 잘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죄송합니다. 저. 기억이 나지 않네요.” “3년 전에 여러 번 통화를 했었는데 만난 적은 없었죠.”
통화를 했다구? 언제? 내가 당신하고? 승욱이 전에 다니던 프리스쿨에 자신이 여러 번 가서 승욱이를 만났다고 했다. ‘아! 그럼, 당신이 그 글로리아?’
기억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캘리포니아에는 시청각 장애인이 대략 1,000명이 있다. 물론 시청각장애인이라도 다 승욱이같이 완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보거나 조금 듣거나 말을 할 수 있거나 약간의(장애의 정도가 달라도) 시청각장애인 범주에 들어가서 모두 시청각장애인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승욱이는 아주 심한 편에 속한다. 전맹에다가 전농에다가 말을 못하니 5% 안에 드는 완전(?) 시청각 장애인인 거다. 글로리아는 가주 정부에 속해 있는 장애부서에 거기서도 시청각장애부서 남가주 디렉터로 일을 한다.
남가주에 속해 있는 시청각 장애인들을 대부분 파악하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한다. 승욱이를 안 것은 거의 5년 가까이 된다고 했다. 승욱이가 프리스쿨에 다니는 것을 눈여겨보던 중에 승욱이가 와우이식을 한 것을 알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남가주 최초로 시청각장애인 중에 와우이식을 승욱이가 했으니 물론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수술이 성공한 것을 알고 3년 전에 ‘글로리아’가 전화를 걸었던 거다. 리서치를 위해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승욱이의 성장과정을 한 달에 한번 자신에게 지면으로 그리고 전화로 통보를 해달라고 했다. 승욱이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많은 시청각 장애인에게 와우이식을 통해 세상소리를 듣게 해주고 싶다는 거였다.
취지가 너무 좋아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처음 만나 자료를 받기로 한 며칠 전 아버지가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만나는 것도 자료를 받는 것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은 못하겠다고 도움을 못줘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를 잊고 살았다. 나와 전화 통화는 끝이 났지만 글로리아는 승욱이가 어느 학교로 가는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계속 지켜보고 새로운 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할 무렵 선생님들을 위해 세미나를 해주러 학교에 온 것이다.
승욱이를 키우는 이 미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는 알지만 사람의 관계만큼은 얼마나 좁은지 많이 깨닫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과 또 그 사람들과의 인연의 끈이 얼마나 질긴지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할 때가 많다. 승욱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앞으로 볼일이 없을 거다 라고 했던 사람들을 거의 다시 만나게 된다.
넓고도 좁은 세상… 글로리아를 만남으로 다시 한번 사람의 만남에 대한 나의 자세를 점검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던지 진심으로 만나고 모든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만남의 축복이 있었는지 게다가 그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다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넓은 세상에 이 좁은 만남들이 나에겐 너무너무 소중하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