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2008-02-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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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욱이형

“엄마, 언제와?” “두 밤 자고 주일 저녁 늦게 와” “엄마, 나도 가면 안 돼?” “이번에는 엄마하고 승욱이만 초대를 받았는데 다음에 갈 때는 승혁이도 꼭 데리고 갈게.” “정말? 진짜 나도 샌프란시스코 데리고 갈 거야?” 승욱이를 데리고 아침 일찍 나서는데 옆에서 승혁이가 빨리 오라고 재촉이다. 따라가고 싶은지 “승욱이는 좋겠다”를 연신 말하고 있다.
22개월 터울로 승혁인 동생이 생겼다. 22개월 동안 외갓집과 친가 집에서 사랑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승혁이가 동생이 생기자마자 선교원에 가게 되었다. 식구들이 동생의 눈을 고쳐 보려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게 되니 아침 일찍부터 두 살도 안 된 아이가 하루 종일 선교원에 있다 오후 늦게야 집으로 왔다. 아침이면 선교원 차가 와서 데리고 갈 때마다 한번 울지 않고 선교원에 가서도 너무 착한 아이였다. 외할아버지 앞에서는 온갖 고집을 다 부려도 다른 식구들에겐 고집이 통하지 않으니 언제나 요구꺼리가 생기면 할아버지를 귀찮게 했다. 친정아버지는 언제나 승혁이를 데리고 목욕을 가셨다. 목욕을 잘 마치면 삶은 계란도 사주고 음료수도 할아버지가 사주니 목욕 가자고 하면 제일 눈이 반짝거렸었다.
그러고 보니 승혁인 22개월 때부터 애라고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승욱이를 낳고 한 번도 승혁이를 내손으로 목욕을 시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옷 입는 것, 목욕하고 씻는 것, 아침에 일어나는 것, 저녁 잠자리에 드는 것에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조용히 있었던 아이라 사람들에게 “어머~ 승욱이한테 형이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들었다. 미국에 와서도 그저 얌전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엄만, 승욱이만 좋아하지?” 약간의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는지 뭐든 승욱이 하고 비교를 하면서 나의 화를 돋우기 시작했다. 점점 말도 많이 하지 않고, 잘 먹던 밥도 잘 먹지 않고, 뭣을 시켜도 언제나 “아니”라는 대답을 먼저 하곤 했다. 미운 짓을 하던 최고조는 친정아버지가 편찮으실 무렵이었다.
승욱이 키우는 것이 너무 버거워서 어느 날은 승혁이와 하루 종일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지나간 날도 많았다. 승욱이 때문에 심부름도 많이 해야 하고, 양보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언제나 승욱이의 스케줄이 먼저였기 때문에 승혁이는 과외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컸다.
승욱이가 기숙사로 가는 것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승혁이 때문이었다. 장애아들도 너무 너무 소중하지만 나에겐 정상인 아들도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뼈저리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과 생각이 우리 가정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애아를 둔 가정에서 정상인 자녀를 함께 키우면 언제나 자녀를 똑같이 평형을 맞춰 키우기가 어렵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는 약한 자녀에게 한 번 더 눈길이 한 번 더 손길이 한 번 더 마음이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승욱이가 기숙사로 간 이후 “엄만, 승욱이만 좋아하지?”라는 질문은 승혁이의 말에서 사라졌다. 좀 더 시간을 같이하고 좀 더 대화를 많이 나누고 좀 더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니 승혁이는 말도 많아지고(너무 많아지고), 밥도 잘 먹고, 대답도 씩씩하게 “넵”라고 하고, 동생을 이해하는 마음도 몇 배나 넓어졌다.
북가주 집회를 가려고 짐을 챙기는 데도 여간 참견이 아니었다. “엄마, 승욱이 하고 어디서 자?” “무슨 밥 먹어?” “승욱이가 엄마 힘들게 하면 어떡하지?” “내가 같이 가면 엄마 도와줄 텐데.” 이젠 제법 컸다고 엄마와 동생을 두루 챙기는 것을 보니 승욱이의 형 승혁이인 것이 이 세상 누구와 바꿀 수 없는 자리인 것 같다.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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