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승욱이 이야기 - 당신과 나 사이(상)

2007-10-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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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까치발을 들고 목을 뺀 남자가 “민아야”라고 나를 향해 부른다. 남편을 스무살 때 만났으니 15년 가까이 그 남자에게서 불리는 이름이다. “언제 나왔어?” 나의 질문에 “새벽 2시30분” “뭐 2시30분?” “응, 잠들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어휴, 융통성 없기는”
처음 오는 인천공항에 눈을 못 떼고 연신 두리번거리니 “왜, 떡볶이 파는데 찾고 있냐?” 한국 도착하면 떡볶이, 순대, 만두, 오뎅을 삼시 세끼 먹으리라 남편에게 전화로 얘기한 것을 진심으로 알았나 보다.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일년반만에 남편을 만나는 것이다. 4년의 연애기간과 10년의 결혼생활을 지내오면서 같이 산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긴 부부가 어색할 만도 한데 우리 남편은 마치 국내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누라를 마중 나온 것 같다.
제일 먼저 아버님의 안부를 물었다. 한시가 급하게 가 봐야 하는 상황인데 출근길에 비까지 마구 퍼붓고 있으니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 차 안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이리저리 우회를 하면서 빠른 길을 찾아 들어간 길이 우연찮게도 우리가 처음 신혼생활을 했던 아파트 길을 들어서게 되었다. “어? 이 동네 하나도 안 변했네. 저기 생각나? 저 상가 아직도 그대로네. 그래도 저기서 살 때가 제일 재미있었는데. 그치?” 친정 부모님과 바로 옆 동 아파트에 살았던 우리는 아버지 이야기며 신혼 때 부부 싸움한 이야기를 하면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십 년 전, 첫 아이를 낳고 남편은 직장을 다니면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우리 부부는 부지런히 돈을 모으며 앞으로의 유학생활을 계획하며 지낼 무렵, 생각지도 않은 둘째가 생겨서 둘째 아이를 낳고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기로 하던 중 우리에게 승욱이가 태어나게 된 거다. 승욱이를 낳은 후 우리의 계획이 있었는지조차 잊고 정말 매주 병원을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승욱이가 눈을 못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미국으로 왔을 때 우린 한국에서 의사 선생님의 오진으로 승욱이의 눈이 많이 망가져 왔음을 알았다. 거기다 귀까지 못 듣는 것을 알았을 땐 한국으로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난 미국에 머물게 되었고 남편과 난 신문에서나 읽었던 기러기 아빠와 갈매기 엄마가 된 것이다. 혼자 한국에 남겨진 남편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오래 전 우리 부부의 계획인 미국유학을 올 수 있었다. 우린 승욱이 눈 수술비로 그리고 내가 미국에 체류하게 되면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정부기관에서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것을 받게 되었고, 미국 내에서도 남편은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갔다. 그런데, 자비를 들여 공부를 한 것이 아니니 의무근무기간이 있고 그래서 아직도 남편은 그 기간을 근무하고 있다.
부부가 떨어져 지내니 얼마나 사연이 많겠는가. 나를 아는 모든 분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이야기가 승욱이 아빠 이야기다. 15년 전, 스무 살 어리디 어린 나를 세뇌시켜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고, 순진무구(?) 민아 아줌마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집안에서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고, 그 말에 남편은 급세례를 받고 나와 결혼준비를 했다. 대대로 예수 믿는 우리 집안에서 일년에 제사를 월중행사로 지내는 집에 시집을 보내겠는가.
남편은 나에게 협박 반 애원 반, 자기랑 결혼하지 않으면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캬, 난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하여간 내 주변의 수많은(?) 남성들을 포기하고 난 남편과 결혼을 했다. 결혼 초부터 어찌나 사고방식이 맞지가 않았는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경상도 안동 오리지널 유교 집안의 아들과 서울 오리지널 기독교 집안의 딸과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았다. 뭐가 쉽지 않았는지 다음 호에….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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