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08-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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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로 임하소서!

LA에서 동북쪽으로 두어 시간 거리에 무심하게 앉아 있는 자그마한 사막도시, 필렌. 그 앞산의 가슴을 열고, 해발 5,000피트에 자리 잡은 능인선원의 뜰은 모하비 사막이다.
온 종일 기승을 부리던 태양도 슬그머니 사위어 간 지 오래된다. 멀리 은하의 강물 아래 아스라이 펼쳐진 사막과 그 위를 섬처럼 점점이 떠있는, 낙타 등 같이 외로운 산들의 파노라마. 이 장엄과 마주하고 있는 너는, 시방 어디쯤 와 있는가.
“불가에서는 선(善)을 참다이 사는 것이라 말합니다.”
먼 길을 떠나오기 전 노스님을 찾아 뵙고, 그새 깊어진 겨울밤의 성화로, 자리를 거둘 참에 올린 말씀이었다.
“참다이 산다 함은 어떻게…”
쌓인 눈을 이기지 못해 솔가지들이 꺾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창호지로 스며든 냉기로 촛불은 노스님의 메마른 형안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배려일세.”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몸체는 마음내림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신 스님께서는, 아랫목 뒷벽에 걸려 있던 ‘하심(下心)’이라 쓰인 족자를 말아, 물러서는 손에다 쥐어주셨다.
그 동안 강산이 두 번을 넘어 변하는 동안, 너는 과연 얼마나 그것을 살았는가.
지고의 선은 ‘배려’라고 했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이고 차별 없는 순수한 ‘배려’를 말합니다. 그리고 ‘배려’는 오만한 겸손이 아닌, 몸에 밴 진솔한 ‘마음내림’에서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생활지침인 탈무드에는 ‘배려’에 대한 지극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앞을 못 보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니십니까?”
“눈 뜬 분들이 나와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요.”
‘하심’에 관한 또 다른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스무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1360∼1438·청백리로 조선초 좌의정을 지냄)은 기고만장,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명선사를 찾게 된다. 무명선사는 당대 불교 선종의 한 종파인 묵조선의 법맥을 휘어잡고 있던 대선사였다.
“내가 최고로 삼아야할 좌우명이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그러자 선사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그야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일랑 하지 마시고, 좋은 일만 골라 베푸시면 됩니다.”
“아니, 그런 거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그래, 먼 길을 온 내게 해주시는 말씀이 고작 그것이란 말이요?”
“허허,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지만, 팔십 먹은 노인네도 행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맹사성은 아랑 곳 없다. 거만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선사께서 그를 달래시며 붙잡는다.
“이왕에 여기까지 오셨으니 차나 한잔 드시지요.”
맹사성은 못이기는 척 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런데 선사께서는 맹사성의 찻잔에 넘치도록 자꾸만 찻물을 따르시는 게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다 적십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이어지는 선사의 말씀이시다.
“그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알음알이가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왜 모르신다 말씀이오!”
선사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밀고 나가려다 그만 낮게 가로지른 문틀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만다. 그것을 지켜본 선사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한 소리 던지셨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대!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박 재 욱 (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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