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꼽추 50년 “등이 펴졌어요”

2007-08-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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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이순신’제작자 백기현 교수 미국순회 신앙 간증

돌 즈음 사고로 ‘불구’
수차례 걸친 자살충동
처음 간 기도원서 기적

아홉 살 고모가 돌을 갓 넘은 어린 조카를 등에 업고 마루 위 상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다 마루로, 다시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척추 뼈가 신발 놓던 디딤돌 모서리에 부딪혀 두 사람 다 꼽추가 됐다. 6·25전쟁 직후였으니, 치료는 생각지도 못하고 평생을 구부정하게 살아야 했다.
등뼈가 굽어 불룩해지고 가슴도 앞으로 나왔다. 밖에 나가면 누가 나를 쳐다보지 않나 싶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 홀로 있어도, 잠을 청할 때도, 편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누워서도 엎드려도 편히 잘 수 없는 체형이었다. 덩달아 세상에 대한 미움도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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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대 백기현 교수가 미국 순회집회에서 꼽추였던 자신이 치유됐던 경험을 간증하고 있다.>

그렇게 50년을 살았다. 그런데 2년 전 바람과 함께 등이 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공주대에서 성악을 가르치는 백기현(55) 교수 이야기다. 8월 한달간 백 교수는 미국을 돌며 신앙 간증을 했다. 24일부터는 남가주에도 들렀다.
현재 백 교수의 몸은 정상이다. 등 뒤에 붙어있던 살이 아직도 조금 불룩한 것이 꼽추였던 흔적의 전부다. 하지만 그 안의 뼈는 이제 곧게 뻗어 있다.
백 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와 인연을 맺고 계속 다녔지만 ‘뼛속까지 신앙인’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단 한 번도 기도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단다.
꼽추라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부해 성적은 늘 1∼2등이었다는 백 교수. 고교 1학년 음악 선생님이던 권혁남 장로가 노래를 잘 하는 백 교수에게 교회에서 특송 한번 하라고 권해 노래의 길로 들어섰다. “한의사가 돼야 꼽추가 밥이나 벌어먹지 않겠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복수라도 하듯 성악에 매달렸다.
서울대 음악대를 나와 그리 어렵지 않게 공주대 교수가 됐다. 하는 일마다 잘 해결됐지만, 오페라는 그에게 산이었다. 오페라 무대에 서려고 했지만 외모와 체구 때문에 수없이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대신 오페라 제작에 나섰다. 그가 만든 오페라 이순신은 한국, 이탈리아, 러시아를 돌며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점차 욕심을 내다 보니 빚만 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액수가 되자 백 교수는 죽음을 택하려 했다.
죽기 위해 약도 사고, 저수지와 낭떠러지에도 갔지만, 결국 용기가 없었다. 2005년 2월4일 설날, 기도원에 가는 아내에게 백 교수는 “나도 가면 안돼?”라고 물었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하던 자신이 어떻게 그 말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고 백 교수는 회고한다.
빚을 갚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백 교수는 ‘오직 십자가를 볼 때 여러분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다’는 강사 목사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십자가를 바라봤다. 옆구리에 살짝 바람이 스쳐갔다. 누가 혹시 만졌나 둘러보았지만 그럴만한 사람은 없었다. 또 다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세 번째 바람이 불 때는 자신도 모르게 “아멘, 할렐루야”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이 들리고 팔이 꺾이고 무릎이 굽어졌어요. 또 고개가 젖혀지고 허리를 꺾는데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어요. 50년 동안 아팠던 부분이 저리고, 시렸던 부분이 개운하고 시원해지고 숨이 커지면서 내 속에 있었던 원망과 고통이 막 나오는데 기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생각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굽은 등을 편다”라는 말이 들려왔다고 백 교수는 말했다. 그렇게 기도원에서 며칠에 걸쳐 치유 과정을 겪으면서 백 교수는 등이 펴지고, 당뇨와 간염까지 고쳐졌다고 한다.
백 교수는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말한다. 고난보다 순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축복이라고도 했다.
“하나님께서 꼭 충격요법을 쓰셔야 하나님께 나아가시겠습니까?”

<김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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