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집 찬양앨범으로 인기 장미경씨

2007-08-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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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에 이룬 찬양사역 꿈
“부르면 어디든 OK”

이동원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는 장미경씨를 ‘전천후 찬양자’라고 부른다. 새벽예배이건, 철야예배이건, 대형교회이건, 소형교회이건, 부르는 곳이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해외라고 예외는 아니다. 몇 달이고 미국, 캐나다에 머물러야 할 길이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무대라면 장씨는 거절을 못 한다.
너무 오래 기다려온 찬양 사역을 하게 된 터라, 장씨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다고 한다. 올해 50세가 된 장씨가 찬양 사역을 시작한 건 6년 전. 찬양 사역자로는 ‘신참’이라 열심히 하고 싶은 의욕이 넘친다.
장씨가 찬양 사역에 대한 꿈을 가진 건 1974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노래 잘 한다는 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장씨였지만,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한국 집회에서 들은 찬양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고.
그때부터 노래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포기하라는 음악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이 악물고 노래 연습에 몰두해 1년만에 서울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성악과에 가서도 찬송가 부르는 것에만 집중해 연습했다. 졸업하면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걸으리라 다짐하며….
그런데 졸업하던 1980년, 그해 여름 결혼을 했다. 그 이듬해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와 찬양 사역자의 꿈을 뒤로 미뤘다. 두 아이 키우며 교회에서 솔리스트로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주부로서 살던 장씨가 찬양 사역자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80년대 초반 장씨가 직접 부르고 녹음한 테입을 시아버지께 생신 선물로 드렸다. 장씨가 여분으로 드린 테입을 시아버지가 주변 지인에게 돌렸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다고.
미국서 살던 장씨가 남편과 함께 귀국한 96년, 꿈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남편이 직장을 다시 미국으로 옮기며 98년 애리조나로 이주했다. 꿈이 사그라질 것만 같을 때, 마침 지구촌교회에서 애리조나에 지교회를 설립했고 장씨는 개척을 도왔다.
“그때 하나님께서 토기장이로서 볼품없는 진흙 같은 저를 잘 빚어주시고 계시구나 느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마음대로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다 2000년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장씨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다. 서울대 음악대 동문으로 찬양 음반 제작에 경험이 많은 신상우씨와 최덕신씨 등을 만나 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 25년 넘게 하나님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만져주셨던 손길을 음반에 담았다. 2002년이었다.
음반을 내도 찾아주는 이가 없었다. 음반만 내면 여기저기서 불러주리라 기대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때부터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고 영성 훈련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다시 준비한 2집 찬양 음반이 2004년 나오자 장씨는 ‘뜨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에 찬양을 시작했으니, 좋아라 다닌다. 몇 명 안 모여도 집회에서 찬양하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한다.
장씨는 또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류 바람이 분 일본에 찬양 열풍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래서 일본어 음반을 내기 위해 열심히 일본어를 외우고 있다.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큼 즐겁게 다닙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 살아 계심을 깊이 느끼며 살아요.”

<김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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