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08-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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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의 미학

“좁은 일본 땅,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는가”
중국의 덩샤오핑(1904-1997)이 국가 주석 재임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일본은 도쿄와 후쿠오카를 잇는 전장 1,068㎞의 신칸센 고속철도를 1975년 완공한 바 있습니다. 최고 시속 260km를 달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열차를 덩샤오핑이 시승하자, 일본 정부 관료들은 그 빠른 속도에 대해 너도나도 앞 다투어 덩샤오핑에게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글의 시작 부분에 옮겨 놓은 말이 그 때, 덩샤오핑이 혼잣말로 넌지시 비꼬면서 던졌다는 그 유명한 말입니다.
‘만만디’ 라고 하는 잘 알려진 중국말이 있습니다. ‘만만디’란 ‘느린 모양’을 뜻한다고 합니다만, ‘천천히 여유 있게’라고 의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중국인의 ‘만만디’ 정신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 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중국의 버스에는 비상시에 사용하도록 하는 문에 ‘비상구’라는 표시가 없고 대신 ‘태평문’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에 화재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너도나도 먼저 빠져 나오겠다고 다투면 많은 사람들이 화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지만, 각자가 차분히 대처하면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지혜가 그 말속에는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대륙적인 기질과 한없는 여유를 엿볼 수 있는, 멋진 ‘느림의 미학’이라 하겠습니다.
이 ‘느림’을 아주 잘 표현한 책이 있습니다. 2007년도 중반 한국 서점가를 맹타하며 베스트셀러가 됐던 작가 심승현의 감성 카툰, ‘파페 포포 안단테’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순수하고 평범한 남자 파페와 수줍어 하지만 엉뚱한 면도 있는 여자 친구 포포를 통해, 더 깊은 사랑과 더 넓은 삶을 위해 무엇이 소중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제목 중의 ‘안단테’란 물론 ‘느리게’라는 음악 용어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조금은 느리더라도 내 삶에 허락된 길이만큼이 아니라, 내게 허용된 넓이만큼 살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또한 느리다는 것이 결코 게으르다는 것이 아니며, 천천히 간다고 해서 실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어떤 이는 이 책을 ‘따뜻한 쉼표’ 같은 책이라고 평합니다.
음악에서도 쉼표는 음표만큼이나 중요합니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쉼표란 없었고, 작곡가들은 소리를 내지 말라는 지시를 할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쉼표 없는 음악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음악은 딱딱하고 여운이 없는 몹시 불완전한 음악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특성은 “빨리 빨리”를 외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60-70년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중단 없는 전진”이란 기치와 “뒤 처지면 죽는다”는 강박관념 아래, 실로 싸우면서 건설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빠르다는 것은 확실히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반면에 숨겨진 많은 부작용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로벌 시대에는 덩샤오핑의 그 말을 이렇게 살짝 바꾸어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좁은 지구 땅,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는가”
치열한 삶의 흐름 속에서, 가끔은 쉼표도 찍어가며 살아보라는 의미가 담긴, 짧은 선시가 있습니다.
설악산 백담사의 입구에는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시가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박 재 욱 (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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