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2007-08-17 (금)
크게 작게
큰 사람과 쫀쫀한 사람

우리는 큰 것을 좋아한다. 작은 나라에서 살다보니 큰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런지 큰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어떤 교회나 선교단체도 큰일을 하기를 원한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기를 원한다. 통상 큰일이란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건물이나 선교센터를 짓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성도가 수백만달러를 헌금했다고 하면 그 사람 또한 큰일을 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에 이렇게 큰일을 한 교회와 성도들이 무수히 많이 배출되었는데도 그 큰일을 한 사람들을 보면 더욱 더 쫀쫀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매우 죄송한 말이지만 그동안 유심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큰일을 한 교회나 단체의 소위 큰일을 한 사람을 보면 큰일을 벌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큰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이다.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위해서는 엄청 큰 사람들이지만 킹덤과 이웃을 말하면 모두 간장 종지처럼 쫀쫀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교회, 단체 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엄청 큰 사람들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일에는 쫀쫀하기 그지없다.
큰일이란 무엇인가? 큰사람이란 누구인가?
큰일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큰 것이고 큰 사람이란 하나님이 크다고 한 것을 크다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다. 눈은 작지만 눈으로 보는 세계가 크듯이 우리는 작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그분의 세계는 크다.
예를 들면, 세례요한은 큰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가장 큰 선지자라고 평가하셨다.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말한다면 세례요한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다. 세례요한의 업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어마어마한 교회건축은커녕 개척교회조차 실패한 사람이다. 자신이 키워놓은 제자들마저 다 빼앗겨버린 못난 스승. 자신의 사명이 맞는 것이냐고 되물었던 심각한 영적 위기에 빠졌던 지도자. 설교할 큰 예배당 대신 광야에서 외쳐야 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처절한 냉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정말로 큰 사람이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광야의 외로운 소리로 살아야했던 세례요한. 그는 정녕 큰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평가에 부화뇌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명을 받기 위해 프로젝트를 재조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기준을 가지고 세례요한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정녕 무능한 목회자이다. 자신이 키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지 말아야 했고 자신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교묘히 빼돌렸다면 자신의 지분은 많이 확보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을 때 바로 자신이 예수님에게까지 세례를 베푼 위대한 종이라고 계속 선전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했다면 엄청난 사람들을 모아 소위 말하는 메가톤급 건축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멍청하게도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내몰고 자신은 쇠하여 없어져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숨었다. 결국 정말 바른 소리만 하다가 미움을 받아 참수형에 처해 죽고 말았다. 지금의 성공기준으로 말한다면 비참한 실패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장 큰 선지자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누르고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충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정말로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누르고 주님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은 큰 사람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쫀쫀한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 커뮤니티와 나라를 위해 자신의 지분을 기꺼이 양도하는 사람.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몫이 쪼그라든 사람이 큰 사람이다. 큰사람을 보고 싶다. 큰사람이 되고 싶다. 큰일을 하고 싶다.

김 홍 덕 (목사·조이장애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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