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철의 테마여행 - 나폴레옹의 비참한 최후

2007-07-3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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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사전에 불가능은 있었다

가정과 정치 모두 실패, 황제의 신분으로 영국군에 포로되는 수모 겪어

파리의 샹제리제 네거리에서 세느강 쪽을 바라보면 금빛 찬란한 돔의 웅장한 건물을 볼 수 있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바킹검 궁전을 섞어 놓은 것 같은 화려한 건축물인데 바로 프랑스 군사박물관 엥발리드다. 원래는 루이 14세가 전쟁 부상병 병원으로 지은 건물로 이 엥발리드의 금빛 돔 교회안에 나폴레옹의 관이 안치되어있다.
나폴레옹은 죽기전 “나는 세느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프랑스 국민들 속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유언을 남겼다.(이 유언은 엥발리드의 나폴레옹 관이 있는 아래층 입구에도 새겨져있다). 그러나 그가 1821년 세인트 헬레나에서 숨을 거두었을때 영국은 그의 시신을 프랑스에 넘겨 주기를 거부했다. 프랑스의 루이 필립왕은 몇년간 교섭 끝에 현지에서 화장한후 재만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사망 19년만인 1840년 그의 유해를 파리로 옮기는데 성공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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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근처 엥발리드 군사박물관 성당안에 안치된 나폴레옹의 관. 바티칸 베드로 성당 지하에 있는 베드로 관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관속에는 시신이 아니라 한줌의 재가 있을 뿐이다.

나폴레옹의 관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천하의 나폴레옹도 결국은 죽어서 한줌의 재 밖에 안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세인트 헬레나에서 그렇게 그리던 아들도 못만난채 외롭게 죽었으니 그의 인생은 “한 많은 인생”에 속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했다. 연상의 연인 조세핀(나폴레옹보다 6살 위다)은 아이를 못 낳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그녀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루이자공주와 결혼해 아들을 두었으나 왕비가 아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친정에 가있는 바람에 가족과도 거의 함께 있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동생의 아들이다. 나폴레옹은 전쟁의 영웅이지만 가정에서는 실패한 남자였다. 조세핀이나 루이자 왕비는 나폴레옹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으며 두여자 모두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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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관은 7개의 관으로 겹겹이 짜여져 있고 대리석으로 덮혀있다.

나폴레옹은 과연 영웅인가. 그는 재위 10년동안 40여 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며 한때 러시아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프랑스 젊은이 500만명이 죽었다. 그 어머니들의 통곡을 상상하면 나폴레옹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죄인중의 죄인이다.
러시아 침공때는 60만 대군이 출정 했다가 거의 전멸하고 6만명이 겨우 살아 돌아왔다. 프랑스 남자들은 키가 작다. 왜 작으냐고 물으면 “키 큰 남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모두 죽었기 때문에”라고 우수개로 대답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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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이집트 전쟁 승리를 상징하는 기둥이 관 2층에 세워져 있다.

그는 워털루에서 유럽 6개국 연합군에 대패하여 나폴레옹 이전에 가지고 있던 해외 영토 대부분을 빼앗겨 국토가 루이 14세때 보다 엄청나게 줄어 들었다. 워털루 패전 이후부터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 위치에서 뒤 쳐졌으며 지금까지 그 이미지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인생 전체는 실패로 그려져 있고 말년은 불가능의 연속이었다. 사람 잃고, 땅 잃고 더구나 황제로서 영국의 포로가 된 나폴레옹을 영웅이라 부를수 있을까. 그는 황제에 오른후 형제와 친척을 왕으로 임명하는등 독재정치를 서슴치 않았다.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술가일 뿐이다. 그를 국민적인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프랑스적인 평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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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에서 내려다 본 엥발리드. 나폴레옹 관은 금빛 돔 교회 아래층에 있다.

<이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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