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06-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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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生) 이미지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시인은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시를 썼다고 합니다. 의식이 몸을 떠나기 직전, 시인은 간병 중이던 제자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톱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자 한 자 시를 새겨나갔다고 합니다.
시인은 처음 3행을 썼다가 한참 시간을 들인 뒤 마지막 행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지막 시구를 2연의 첫 행으로 짐작하는 모양입니다.
시인의 유해는 강화도 전등사에서 화장되어 수목장으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고인의 마지막 시구처럼, 더 잃을 것이 없던 시인은 어쩌면 나무 속에서, 연습 삼아 그렇게 자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국 시단에서는 고 오규원(1941~2007) 시인을 시적 언어의 투명성을 고집하며 자신의 독특한 시세계를 일군, 언어 탐구의 거목이라고 평가합니다.
살아생전 시인은 ‘날 이미지’ 시를 제창했습니다.
시인은 ‘날 이미지’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나 중심의 관념적 세계를 벗어나, ‘그냥 있을’ 뿐인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순수한 존재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언어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 시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무엇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내가 숨겨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라.”
또한 시인은 자신의 시론과 ‘날 이미지’에 대해 “시는 해방의 이미지다. 나는 해방의 이미지를 위해 시를 쓴다”고 주창합니다. 그러면서 ‘날 이미지’가 갖는 함정에 대해서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날 이미지’도 이미지다. 따라서 언어로 되어 있다. 이 점을 망각하면 존재의 현상을 언어화한 ‘날 이미지’를 순수 존재의 현상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의 염원은 아마도 존재현상에 대한 순수화, 진실화의 과정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현상과 인식의 기본적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눈, 귀, 코, 혀 등 인식 주관인 감각기관이 각자 형체, 소리, 냄새, 맛 등의 해당 대상과 부딪히게 되면, 개별적인 인식이 발생하게 된다. 그 때, 최초로 외부에 무엇이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거의 동시에 개별적인 인식들은 종합되어 개념화되고 언어화된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정관념, 분별과 차별심 등 주관이 개입되어 대상을 보는 시각이 자기 이해로 한정되고 굴절되어 버림으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산은 그렇게 ‘있을 뿐’인데, 그 산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각자 다른 산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선가에서 깨달음은 이러한 자기 이해, 자기 한정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체득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청원유신(중국 송나라·?∼1117) 선사의 하문입니다.
이 노승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깨침의 문턱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더라.’ 허나 마침내 깨치고 보니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더라’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말해 보라! 말해 보라!

박 재 욱 (LA관음사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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