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2007-06-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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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유행하는 ‘구구팔팔이삼사’는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동안만 고생하고 죽겠다는 생각을 뜻한다. 현재 한국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를 코믹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죽으면 보람되고 행복할까? 많은 사람들은 건강하게 장수하다 죽는 게 최고의 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장수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크리스천에게는 고상한 목표가 아니다.
잘 먹고 건강하게 아프지 않고 수명을 다하고 자연사했다고 치자. 이것이 인생 최고의 면류관일까? 어떤 사람은 벼락 맞아, 자동차 사고로, 비행기 사고로, 지진으로, 몹쓸 병에, 권총강도의 손에 어이없이 죽는다. 이렇게 죽는 사람 중에 크리스천도 예외일 수 없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은 무병장수 자연사한 사람보다 훨씬 큰 문제를 가진 벌 받은 사람인가? 이런 죽음에 대한 크리스천의 평가는 매우 영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 사람보다 훨씬 세속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가 추락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중에 살아남은 한 크리스천은 자신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하는 것은 지극히 큰 모순이다. 이 말 속에는 삶은 축복이요 죽음은 저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같은 사고로 죽은 크리스천의 죽음은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부분 크리스천의 정서는 하나님이 징계하셨다 거나 죄에 대한 징벌로 이해하는 쪽이 단연 우세하다.
과연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셔서 사람을 죽음의 문으로 하나씩 부르시는 걸까? 장수무병 자연사 일등석, 비행기 자동차 사고사 이등석, 암 사망 삼등석, 몹쓸 병 사망 말석, 이렇게 천국의 자리를 구분하여 놓으셨을까?
아니라고 본다. 죽는 방법이 다를 뿐 죽음에 대한 차등은 없다. 다만 죽는 그 순간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심판의 기준에 얼마나 점수를 받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아담의 죄로 인해 주어진 인류의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심판을 개인 죽음의 이유에 적용할 수 없다. 개인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새로운 시작이기에 영광스런 축복이라 해야 맞다. 가령 사고에서 살아났다면 살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니 축복이요, 죽었다면 그것 또한 부활의 영광의 시작이니 더 큰 축복일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입으로는 천국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죽음은 저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물론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건강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강 자체가 축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건강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들어야 축복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장애나 불치의 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 있어서도 장애나 질병 자체가 저주일 수는 없다. 오히려 장애나 질병을 축복으로 만들 수 있다.
세상 사람의 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지만, 크리스천의 과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이라면 늙어지면 죽음이 보이지 않고 부활이 보여야 한다. 그렇다면 추한 세상사에 미련을 빨리 떨쳐버릴 수 있을 텐데….

김 홍 덕 (목사·조이장애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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