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향 문화사역 ‘연어’될 것”

2007-06-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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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넘어 북한·중국선교 나서는 이정남 목사
자신의 삶 여정 담은 ‘주님이 가라시면’출간

목사가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사람이라고 알았던 한 꼬마가 있었다. 자신의 배가 아프면 어김없이 목사에게 달려가던 그 꼬마의 어머니는 6·25전쟁 때 폭격이 시작되면 ‘우리 가족을 보호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때 어머니는 꼭 ‘예수님’을 읊조렸다. 꼬마는 어려서부터 기도의 효험이 있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온 마을이 폭격에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자신이 거주하는 방은 총알 하나 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남한 이 꼬마는 학교에 들어가서 숫자를 배운다. “…일곱, 야들….” 여덟의 북한 사투리가 야들이라 그렇게 발음했는데, 온 아이들이 다 웃었다. 44년생 꼬마 이정남에게 고향을 떠난 첫 기억은 그랬다.
한일 수교를 반대하며 6·3운동에 참여했던 게 교사가 된 이정남에게는 두고두고 ‘주홍글씨’가 됐다. 아무리 학교를 잘 가꾸고, 학생 지도를 잘 해도, 이정남은 ‘데모꾼’이었다. 학교에서도 쫓겨난 그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야학을 시작했다. ‘신명실업중고’는 그렇게 탄생했다. 정규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었던 신앙교육을 할 수 있었던 게 하나님이 예비한 섭리였다고 생각한다.
많은 북한 실향민이 그랬듯, 이 목사도 부모 초청으로 미국 이민을 왔다. 1982년이었다. 당시는 목사가 아니었다. 1984년 가주평강교회를 평신도로 함께 창립했고, 91년에 장로가 됐다.
이후 선교에 뜻을 두고 미션하우스를 운영했다. 유엔에 비정부기구(NGO)로 등록된 미션하우스는 소말리아, 르완다에 구제와 선교를 했다. 특히 선교사와 자녀들을 돌보는 안식처 역할도 했다.
쉰이 넘어 1995년 목사로 임직한 이 목사는 베델선교교회를 개척하고, 1998년 워싱턴메시야장로교회로 청빙을 받았다. 2002년에는 가주평강교회 담임으로 돌아왔다. 2005년에는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도 맡았다.
그런데 이제 이 목사는 ‘연어’가 되려고 한다. 환갑이 지난 뒤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탓이다. 야들이라는 사투리로 인해 웃음거리가 됐던 기억을 담고 중국과 북한에 도움을 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북아 문화 교류재단’을 창립해 중국과 북한에 흩어져 있는 한인에게 문화로 사역하려고 한다.
“중국 조선족만 봐도 우리와 문화가 너무 많이 달라졌어요. 서로 달라진 문화를 모르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같은 민족이라도 소용이 없겠죠. 문화를 통해 서로의 삶을 이해시킬 수 있게 노력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이 목사는 7월 중국 단둥과 센양으로 떠난다. 장기간 중국에 머물면서 문화 사역을 벌일 예정이다. 이를 위해 한국에 들러 연예인과 축구단으로부터 협력 약속도 받았다.
“연어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며 900마일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죠. 저도 연어처럼 제 핏줄, 고향을 위해 마지막 남은 생을 바치려고 합니다.”
이 목사는 자신의 삶의 여정과 앞으로 계획을 신간 ‘주님이 가라시면’(사진)을 통해 털어놓았다. 소설가 최정열씨가 이 목사와 3일간 밤낮 대화를 하며 이 목사의 삶을 이야기했다. 이 책의 출판 기념회는 14일 오후 6시 가든스윗 호텔에서 열린다.

<김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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