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05-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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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

공격 목표까지는 약 17㎝의 머나먼 길. 별 다른 장애가 없을 경우 대략 30분이 소요되며, 약 3억명의 전사들이, 거의 전멸할 가능성이 있는 가공할 전투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병력이 투입되는 이유는, 공격 루트에 험난한 계곡(주름)과 깊은 정글(섬모)들이 워낙 많아, 실종되는 전사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찌 되었건, 전투는 시작되고, 전사들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험난한 장애물과 동시에 적군인, 다른 전사들과 함께, 결코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레이스를 펼칩니다. 천신만고 끝에 극소수의 전사들만이, 목표 가까운 지점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생존 전사들도 마냥, 안심할 일만은 아닙니다. 이제는 난공불락의 요새(난자) 공격에, 또 한번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살아남은 전사들은 드디어,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사들은 머리 부분에서, 화학무기인 분해효소가 장착된 탄두미사일을 발사하여, 난자의 세포막을 뚫고, 자신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통로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포막을 무사히 통과한다 해도, 아직도 난관은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견고한 방어벽인 투명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사들은 마지막 남은 필살의 무기인, 2차 분해효소 탄두 미사일을 발사하게 됩니다.
먼저, 이 미사일 발사로 방어벽을 약화시킨 다음, 이번에는 땅굴파기 작전을 펼쳐야, 비로소 투명대를 통과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다른 전사들도 죽기 살기로, 땅굴파기 작전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투명대 통과에 한발이라도 뒤쳐진 여분의 전사(정자)들은 이번에는, 안전하게 수정란을 만들기 위해, 난자가 내뿜는 화생방 무기인 분해효소에 의해, 몰살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먼저 땅굴파기 작전에 성공한 위대한 전사(정자)는 홀로 투명대를 통과하게 되고, 드디어 난자는 정자를 세포질 안으로 서서히 함몰시킨다고 합니다. 마치, 세상 모든 존재들을 블랙홀이 빨아들이듯이….
삼사합회. 한 생명의 기원과 재생을 설명하는, 결코 만만찮은 불교용어입니다. 정자와 배란기의 난자, 그리고 업의 잠재세력에 휩싸여 싸늘한 몸을 떠난 의식, 이 세 가지가 융합하여 새 생명을 움트게 한다고 해서 이르는 말입니다.
수억의 무명용사들이 장렬히 산화한 그 참혹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영웅도, 결국, 그렇게 끝 모를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녹아들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신화 속 불사조인 피닉스가 스스로 제 몸을 불살라, 눈부시게 빛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듯이….

박 재 욱 (LA관음사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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