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2007-05-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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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내일

니체만큼 기독교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1883∼1885)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또 그의 저서 ‘선악의 피안’(1886)에서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고까지 비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신’은 “기독교적인 하느님과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의 세계를 통칭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니체 연구가들의 철학적 해석일 뿐, 1800년대 후반의 유럽 기독교는 니체의 비난에 경악하고 그 폭풍에 비틀거렸습니다.
니체 사후 50여년 후, 칼 야스퍼스는 1938년에 논문‘니체와 기독교’를 썼습니다. 이 논문은 1947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1963년에 보완되어 독일에서 다시 발행되었습니다. 대략 70년 전에 쓴 논문이니 말하자면 고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스퍼스는 이 논문에서 기독교 성직자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정황과 배경을 꼼꼼하게 고찰하여 매우 차분하게 니체의 속마음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은 살아 있던 신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고, 유럽 교회 속에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 논문에서 니체가 예수에 대하여, 또는 기독교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 어록들을 예문으로 나열합니다. 그러면서 ‘신의 죽음’을 니체의 다음 말에서 그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더 이상 기독교 신자로 있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불신이 아니라 더 엄격하고 세련된 독실한 신앙 그 자체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그 신은 ‘기독교회의 신’일 뿐이라는 해석입니다. 독일 교회의 ‘숨막히는 신앙관’은 꿈틀거리고 올라오는 인간의 존엄성을 수용할 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교회는 교회가 만들어낸 교의에 갇혀 질식해 가고 있다고 보았던 니체는 더 이상 거기서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신은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을 여행해 본 분들은 텅텅 비어 있는 교회, 오직 관광 장소로 전락한 교회를 보게 되고, 신은 죽었다고 소리친 니체의 선험자적인 안목을 다시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200년 전에 니체는 이미 복음서의 예수와 아무 상관없이 오직 교회가 교회 되는 일에 몰두하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에서 신의 죽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캐나다 모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하는 오강남 박사가 수년전에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내 충격을 준 일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이런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출판사에서 ‘이런’을 떼어버렸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과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열거하며 “그런 교회의 이런 예수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은혜, 축복, 치병을 슬로건으로 무속 신앙을 방불하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세를 이용해서 세속정치와 교권을 동시에 갖고 싶어하는 목회자들을 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런 현상 때문에 오강남 박사가 지적하는 대로 예수가 없는 교회가 되어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내일의 한인교회를 텅텅 비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새로운 세대들에게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 건전하고 튼튼한 교회의 내일과 우리 자녀들의 구원이 약속됩니다. 유럽의 교회들처럼 너무 늦기 전에 교회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송 순 태 (미주 시조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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