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2007-04-2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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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식 민족주의

지난주는 버지니아에서 발생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전 세계와 미국 전역이 충격과 슬픔 속에서 보낸 일주일이었습니다. 우리 한인사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충격 속에서 사건의 후속 보도에 촉각을 기울이는 등 초미의 관심을 보였습니다.
어쩌면 여느 때처럼 “또 끔찍한 일이 일어났군…”하며 바쁜 일상을 핑계로 무감각하게 지나쳤을 지도 모르는 사건에 우리가 그렇게 충격과 함께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단 한가지, 사건 다음 날 공식 발표된 “범인은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전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에서조차 즉각적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첫 반응은 같은 한국인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에 대해 미안함과 그로 인해 예견되는 사후 파장, 즉 나와 내 가족에 대한 비난, 보복, 더 나아가 한국인의 이미지 손상 등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국 언론은 그런 반응을 “같은 민족이라는 집단 동질성에 바탕을 둔 죄책감”으로 표현하며 이질적인 소수민족 문화에 대한 신기함을 드러냈습니다. 보복에 대한 우려와 걱정에 대해서는 “이번 사건은 개인의 범죄일 뿐 한국인이라는 민족, 집단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위로를 보냈습니다.
그 다음 우리가 보인 반응은 약간의 안도와 아울러 지나친 미안함의 표현이 오히려 미 주류 사회의 시선을 우리에게 집중시킬 수 있으니 자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관심과 반응이 일관되게 우리들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으며, 결국 우리가 받은 충격의 본질이 우리 자신에게 미칠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전혀 거부감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비극적 참사라 부릅니다. 참사란 ‘혹독할 정도로 아픈’ 사건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은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당연히 고통과 아픔은 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비극적 참사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아픔에 대한 위로와 그들의 고통에의 동참이 최우선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터넷을 포함한 한글 매체를 통해 피해자 32명의 명단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한국계 여학생, 한국인 교수의 스승 등 그것조차도 우리 한국인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만 있었을 뿐입니다. 수많은 기사가 페이지를 장식하고 전파를 타고 흘렀으나, 남은 자들의 슬픔을 함께 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한민족, 한겨레라는 연대감과 백의민족, 한핏줄에 대한 자부심을 인생의 경쟁력으로 활용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민족주의라고 불러왔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 사건에 대처하는 나,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자랑하던 민족주의가 나, 우리 그리고 우리 집단의 이해만을 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는 아니었는지 자문해 봅니다.
아마도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보호, 이해에 민감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타인의 고통도 나의 고통과 똑같은 무게로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의 보호막을 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던 나약한 민족주의를 탈피하고, 과감하게 보호막을 걷어 내고, 거친 강호로 나가 그 곳에서도 밝게 빛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발자국은 바로 자기 희생과 사랑입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코리아데스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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