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승욱이 이야기 하나 그리고 셋

2007-04-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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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가 돌아가시기 바로 3주 전에 한국을 다녀왔다. 미국 와서 7년만에 시아버님이 위독하셔서 급하게 한국을 다녀 온 것이다. 모든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15년 전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그 기도가 생각이 났다. 어린 아기가 미국의 어느 가정으로 입양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 말이다.
15년 전, 난 집 근처에 있는 성로원에 봉사를 다녔었다. 방학이 길었던 대학시절 일주일에 두번 시간을 정해놓고 가서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너무 예뻐서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었다. 봉사를 가던 성로원은 0세부터 5세까지 아이들이 있었는데 5세가 될 때까지 입양이 되지 않으면 전국의 고아원으로 아이들이 옮겨지게 되는 곳이었다.
아이들을 만나고 오는 날 밤은 알 수 없이 마음이 괴로웠었다. ‘왜 저렇게 예쁜 아기를 버렸을까, 도대체 어떤 부모이길래, 무슨 사연일까, 그래도 어떻게 자식을... 보고 싶지도 않나?’
당시 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세상물정을 몰랐고 그저 아이를 버린 부모를 스스로 원망하며 부모가 꼭 아이를 형편이 될 때 찾아가길 기도했다.
내가 예뻐하던 아기들이 하나 둘 입양되지 못하고 전국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이 다음에 제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아이 하나를 입양해서 키우겠습니다. 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며 그곳에 봉사를 다녔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는데 매해 축제 때마다 우리과의 특별 이벤트는 학교 근처의 고아원 아이들을 모두 초대해서 우리가 직접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게임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다.
시간은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살던 동네도 이사를 가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남편과 결혼해 살면서 성로원에서의 내 기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게다가 승욱이까지 낳았으니 내 삶이 오죽 정신이 없었겠는가. 승욱이 키우는 것에 너무 바빠서 예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나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고 살았던 거다. 그런데 오래 전 나의 기도를 일깨운 비행기 안에서의 한 아기를 보면서 난 미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내가 그때 그런 기도를 했었지. 승욱이도 이제 많이 컸으니 미국에 도착하면 입양에 대해 한번 알아봐야지.’
미국으로 돌아와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하루종일 듣는 기독교 방송에 그날 따라 입양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난 입양 기관의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그날 밤 엄마에게 넌지시 “엄마, 예쁜 딸을 하나 입양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바로 “승욱이는!” “ 지금 당장 말고 승욱이 조금 더 크면” “네가 애기 하나 더 낳지 입양이 그리 쉬운 줄 알아? 자기새끼 키우면서도 속을 끓이는데 어떻게 남의 자식을 키워? 거기다 승욱이가 좀 힘들게 하니?” “그러니까 엄마가 기도해줘. 다 잘 키울 수 있게.” “왜 생고생을 사서하려는지. 쯧쯧쯧.”
그리고 며칠 후 형부가 천국으로 간 것이다. 엄마는 형부의 장례식을 앞두고 나에게 “민아야, 남의 애기도 입양 한다고 그랬는데 네 조카를 키우는 것은 그보다 더 귀한 일인 것 같아. 예쁜 딸을 입양한다고 그러더니 예쁜 딸에 덤으로 아들까지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해. 거기다 너 힘들까 봐 다 키워서 너에게 보내셨으니 이 얼마나 확실한 기도응답이냐?” “ 그러게. 감사하지. 남의 애도 데려다 키워 주려 했는데 하물며 내 조카는 그래도 내 핏줄이니 얼마나 감사한지.”
특별한 장애 아들 승욱이 하나에, 그리고 올망졸망 귀염둥이 애가 셋이니 난 자식복도 참 많다.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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