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운동하며 부모·자식간 情 나눈다”

2007-04-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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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땅에서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맺고 사는 건 쉽지 않다는 상투적인 말로는 부족할 만큼 힘겹다. 아니 솔직히 고달프다. 단어의 미묘한 차이보다 더 큰 간극이 존재하는 1.5와 2세. 어찌 보면 그들도 고달프긴 마찬가지. 이민 와 뼈 빠지게 고생해 ‘너 하나만은 번듯하게 성공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1세 부모들의 말없는 압력에다 예민한 사춘기에도 언어와 문화 차이로 부모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의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다. 물론 담장 너머 집안사정이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제나라 제 땅이 아닌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자식 키우기는 분명 1세들에겐 큰 업보다. 그러나 업보는 원래 누가 뭐라 해도 이고, 지고 가야 하는 법. 억겁 인연의 매듭을 묶은 이상 불철주야 관계를 되새기고 돌아보며 정진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 이를 열심히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결코 쉬워 보이지도 않는다. 아들과 혹은 딸과 생활 속에서 부지런히 함께 운동을 하는 이들이다. 형제를 데리고 6년째 마라톤을 하는 한성식씨와 몇 달 전 두 딸들과 함께 에어로빅을 시작한 김미경씨를 만나봤다. 자녀들과 함께 땀 흘리며 이들이 얻는 것은 건강보다는 바로 그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이었다.

<김미경씨와 딸 둘>

삼모녀, 에어로빅으로 살 빼고 대화도


■춤추면서 온몸으로 이야기 해요
김미경(39·LA)씨는 딸 둘과 함께 석 달전 타운의 한 댄스 학원에 등록했다. 셋째를 낳고 빠지지 않는 미경씨의 체중은 물론, 운동부족으로 최근 몸무게가 늘어난 딸들의 몸매 관리도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제 세돌 지난 막둥이 보랴, 집안 일 하랴, 비즈니스 하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 학원에 등록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아이들에게만 운동하라고 다그칠 일이 아니다 싶어 독한(?)마음 먹고 등록했다.
레슨이 있던 12일 찾은 타운 댄스 스튜디오에서 삼모녀는 딸과 엄마가 아니라 세자매가 아닐까 싶을 만큼 깔깔거리며 에어로빅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언뜻 보면 모녀가 아니라 친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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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은(왼쪽)·예진양과 김미경씨가 LA 한인타운 댄스 스튜디오에서 에어로빅 기본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서로 격려하며 친구가 된 기분이어요”

“엄마,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오른팔 뻗어야지”
“예은아 허리를 안쪽으로 더 굽혀봐, 자 이렇게”
“에이, 엄마도 구부정한 게 이상하면서 뭘.(웃음)”
일견 서로들 서로의 흠을 잡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듯싶지만, 그 속엔 모녀지간의 정을 뛰어 넘어 친구처럼 살갑고 정겨움이 넘쳐난다.
“너무 좋죠. 아이들과 친구가 된 것 같아요. 자녀들과 공통주제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운동하면서 그나마 에어로빅 이야기도 하고 몸무게 이야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시작할 걸 그랬습니다.”
특히 둘째 예진(10)이는 애교가 넘쳐난다. 엄마와 함께 에어로빅 하니까 좋으냐는 질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큰 딸 예은(12)이 역시 동생과 단둘이만 여러 운동을 해봤지만 지금처럼 재미있게 해본 적이 없단다.
“엄마가 같이 하니까 하기 싫다는 생각이 훨씬 덜 들고 평소에도 함께 에어로빅 이야기며 학교생활 등을 이야기하니까 엄마가 더 가깝게 느껴져요. 특히 셋이 함께 하니까 중간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 끈기도 생기는 거 같고요.”
제법 의젓하게 말하는 큰딸의 말에 둘째 예진이도 거든다. “그냥 좋아요. 엄마랑 뭐 해본 적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같이 와서 함께 댄스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함께 웃고 그것만으로 너무너무 좋아요.”
물론 이 삼모녀의 가장 큰 댄스 목적은 역시 살빼기. 미경씨나 큰딸 예은이는 반년 안에 10파운드 감량이 목적이다.
‘살은 빼고 사랑은 더하고’. 이들 모녀가 댄스를 통해 얻는 땀방울 송송 맺힌 값진 열매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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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식씨와 아들 둘>

삼부자, 나란히 LA마라톤 출전 완주


■아들아, 세상을 향해 뛰어라
뛰는 이들치고 그냥 달리는 이들을 본적이 없다. 특별한 요령도, 기구도, 심지어 복장도 필요 없는 이 원초적인 뜀박질에 어떤 이는 건강을 걸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극기라는 슬로건을 걸기도 하고 혹자는 인생을 걸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마라톤엔 뜀박질 그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성식(47·풀러튼)씨 삼부자 역시 잘 살펴보면 그냥 뛰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다.
6년째 열혈 마라토너인 한씨는 절친한 친구의 권유로 마라톤에 입문했다. 처음엔 마라톤 예찬이 늘어지는 친구에게 뒤질쏘냐 시작했지만 2002년 LA 마라톤에 처음 참석하고 나서는 마라톤 예찬론자가 됐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당시 열다섯이 된 큰아들 동호(17)군을 마라톤에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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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호(왼쪽)·동호군 그리고 한성식씨가 풀러튼 인근 공원에서 마라톤 연습을 하고 있다>

“같은 목표 향해 뛴다는 것이 즐거워요”

“제가 좋아하는 책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로마인들은 열다섯 성인식을 세게 치르더군요. 물론 성인식이라는 의미에는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죠. 그래서 그 해 열다섯이 되는 큰 놈에게 자기와의 싸움이며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마라톤을 함께 뛰어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마라톤 연습에 부자가 나오는 풍경은 평범할 듯싶지만 실제론 그리 흔한 풍경이 아니어서 연습하는 모든 이들이 부러움 반, 의아함 반으로 한씨 부자를 지켜봤단다. 3개월 연습 끝 드디어 부자는 2005년 LA마라톤에 나란히 출전했다.
워낙 체력도 좋고 우직한 성격이라 장남 동호군은 첫 대회에서 보기 좋게 완주했고 기록도 좋았다.
“마라톤은 다른 모든 운동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건강이나 체력적면보다 더 좋은 것은 아버지와 같은 시간에 함께 뛴다는 것이죠, 무엇보다 아버지와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뛴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엔 역시 열다섯 살이 되는 막내 민호(15)군을 마라톤 연습에 참가 시켰다. 그리고 이번 LA 마라톤에서 삼부자는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하는 감격을 맛봤다.
“큰아들은 우직해 워낙 연습에도 성실히 임했고 첫 대회 때도 내 도움 없이 완주를 했는데 둘째는 막내라 그런지 결승점까지 함께 데리고 뛰었죠.(웃음) 그래도 완주의 약속을 지켜 얼마나 대견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몇 번째 대회 참석인데 이번 대회만큼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번 대회에서 장남 동호군은 아버지를 1시간씩이나 제치고 4시간14분에 골인해 한씨를 더 흐뭇하게 했다.
“함께 뛰면서 제일 좋은 것은 역시 대화 아니겠습니까. 한창 사춘기인 틴에이저에 바쁜 1세인 제가 그나마 뛸 때 공통의 화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한 행복한 추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좋은 선물이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자신보다 한 뼘씩은 더 큰 건장한 아들들과 함께 뛰면서 얻은 것이 훨씬 많다는 한성식씨. 아마 그러고 보면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함께 무언가를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서 부모들은 훨씬 더 값지고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을 얻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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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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