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07-04-20 (금)
크게 작게
빛과 소금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과 달리 ‘말씀’을 먹고 산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에 따라 살면서 세상을 밝히는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마태오 복음 5장16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신 데서 알 수 있다.
세상을 밝히는 빛과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은 듣기에는 무척 좋은 말이다. 그 역할의 고귀함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아무나 선뜻 나설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빛이 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스스로 태워 없애는 촛불의 아픔 때문이다.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녹아야 하는 아픔이 있다. 다시 말해 희생 없이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는 소리다.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는 빛이 될 수 없고, 희생의 아픔 없이는 소금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아픔인데도 빛과 소금이 되고 싶어하는 삶 속에는, 분명 아픔보다 훨씬 더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쁨 때문에 피땀 흘리는 가장들의 노고가 있고, 자신을 바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헌신적 삶이 있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주는 자의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주는 것이 기쁨임을 알게 된다. 받는 기쁨은 항상 목이 마르나, 주는 기쁨은 샘솟듯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면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기쁨 때문이다. 그 기쁨이 사랑의 환희였음을 세월이 흐르면서 저마다 깨닫는다.
십자가의 죽음은 마지막 당신 생명마저 주시고 싶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결국 죽는 아픔을 이기시고도 남을 만큼 인간에 대한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이요 기쁨이다. 마치 연인끼리 죽도록 사랑하고 싶어하듯, 주님은 우리와 그토록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인간이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기쁘게 사는 것을 보시고 행복해 하신다. 그렇기에 엄마는 아기를 갖게 되면 열달 동안의 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에게 살과 피를 나누면서 기미 낀 얼굴에 ‘주는 기쁨’이 가득 번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6·25전쟁 직후 먹을 것이 없어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면서도 젖을 먹는 아기를 보며 행복해 하던 그 가난한 어머니의 모습은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말해준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도, 계산할 수도 없는 행복과 기쁨이 있다. 이런 행복은 촛불과 소금처럼 주기 위해 스스로 녹아 내리는 주는 기쁨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인 우리 모든 크리스천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모양이다. 이것이 ‘주는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창조법칙 아닐까?

김 재 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