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2007-04-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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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야유와 고난

성경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고난 주간 초반에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제자에게 어린 나귀를 가져오게 해 타고 유월절 닷새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많은 군중이 나와서 예수님을 앞뒤로 에워싸고 “다윗의 후손에게 호산나!”라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겉옷을 벗어 깔아드리는가 하면 종려수 잎을 꺾어 깔아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제자 요한은 ‘너희 왕이 새끼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구약 경전의 예언을 현실로 이루는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대다수 성경학자나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과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예루살렘 나들이가 예언을 이루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이 왜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의 미움을 사고 급기야 그 주일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다른 연유를 언급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신학 교수인 하비 콕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한 형식은 로마 정복군이 정복한 지역의 도성에 입성하는 형식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대는 항복한 적국의 수도나 도시에 입성할 때, 정연하게 말을 타고 들어가면 그 수도의 백성이 나와서 겉옷을 벗어 깔아주고 나뭇가지를 꺾어 깔아주는 환영을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예수께서 의도했든 안 했든, 새끼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깔아드리고 환호하는 그 정황은 로마 군대가 입성하는 흉내이고 일종의 야유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지도자들은 이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모욕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내 아버지 집을 장사와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두고 로마인들의 축출을 빗대어 보여주는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랍비들은 “저 젊은이가 저러다 다치지, 아마”하고 걱정했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주일이 채 못되어 예수께서는 체포되고 처형되셨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예수께 혹독하게 모함한 사람들은 유대 지도자들이고 로마 총독 빌라도를 비롯해서 군대의 지도자들은 예수께 상당히 관대했던 것처럼 표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대인의 학대를 피해서 타국으로 떠돌아야 했던 제자들이 로마인들을 상대적으로 좀 후하게 이야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매질하거나 십자가에 처형한 집행인들은 모두 로마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야유한 식민지인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젊은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며 환영을 받으신 일, 성전의 장사치들을 쫓아낸 일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위험한가를 그 분 스스로 잘 아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래 억압당하고, 수탈 당하고, 좌절 속에 있는 자기 민족에게 로마의 창칼 앞에서도 유대 민중의 새로운 지도자가 당당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백성을 위로하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했던 위대한 젊은이, 예수님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은둔하고 인간의 안일을 다독이는 종교가 아닙니다.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신앙과 민족과 인간의 바른 길을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은 진실로 값진 것이었습니다.

송 순 태 (미주 시조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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