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04-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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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 없는 함

허벅지에까지 차 오르고도 족히 남을 성싶다. 아침나절에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가고, 그 사이 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두 스님은 물끄러미 흐르는 물만 바라보며 무심한 듯한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잘 차려 입은 젊은 아낙은 안절부절 망연하다.
그 때다. 갑자기 걸망을 팽개친 어른 스님이 쏜살같이 달려가, 그 아낙을 들쳐업는다. 그리고는 냅다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낙은 도리 없이 낯선 남정네의 등에 붙어 어쩔 줄 몰라 한다.
얼떨떨하기는 젊은 스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잽싸게 어른 스님의 걸망을 주워 메고는, 꼬랑지에 불붙은 들쥐처럼 후닥닥 뒤를 따라 붙는다.
무릎께를 밀어붙이며, 지나가는 물살의 힘이 제법이다. 물을 반 넘어 밀고 나오자, 힘에 부친 스님이 자주 비틀댄다. 그럴 때마다 놀란 아낙은 두 팔로 죽어라 스님의 목을 잡아끌고, 두 발로는 스님의 허리통을 더욱 쪼아 붙인다. 허허, 이런 낭패가! 뒤따르며, 힐끗힐끗 훔쳐보는 젊은 스님의 눈방울이 토끼 눈이 되었다, 도끼눈이 되었다 바삐 돌아간다.
엎어질 듯 물을 건넌 스님은 목에 매달려 있는 아낙을 동댕이치듯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남이 볼 새라 쩔쩔매고 있는 아낙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걸망을 받아 메고는 훠이 길을 재촉한다.
두 스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멀리 보며 걷고 걷는다. 어느덧 산이 품고 있던 절 집이 눈에 잡힐 즈음, 그 때까지 무겁게 물고 있던 젊은 스님의 입이, 뒤틀린 심사를 실어 기어코 터지고 만다.
“스님! 출가한 비구가 아녀자를 등에 붙이고는.”
틈새를 비집고, 말꼬리가 가차없이 잘려나간다.
“허허, 이놈 보소. 놓고 온 지가 반나절인데, 네놈은 여태, 그 아낙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고? 고얀 놈!”
‘이완시간’이란 물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심리학 분야에서 차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가령, 마음의 부정적 감정인 탐착과 갈애, 분노와 증오, 교만과 자만, 이기심 등으로 해서, 마음의 평형이 깨어지고 나면, 원래의 평형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마음의 평정을 다시금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이완시간이라고 합니다.
수행이란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이완시간을 극소화시키기 위한,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불교의 최종 목표가 인격의 완성에 있다면, 완성된 인격은 이완시간이 0인 경지가 될 것입니다. 그 경지는 온갖 분별심과 차별심,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소멸된 무위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는 아예, 이완시간이란 개념조차 개입할 여지가 없는, 절대경지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 절대경지에서 언행을 무위의 행, 즉 ‘함이 없는 함’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함이 없는 함’ 속에서 사시는 분을, 불가에서는 ‘붓다’라고 부릅니다.

박 재 욱 (LA관음사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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