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활절을 맞으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2007-04-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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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21억 그리스도인은 오늘부터 5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만, 예수님의 부활은 소생과는 다릅니다. 이는 다른 차원에로의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밑바닥에는 인류가 체험하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표징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과 부활, 빛과 어둠, 물과 불, 빵과 포도주 등이 그런 표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표징 안에 인간 실존에 대한 의미와 인식, 믿음과 사랑, 생명과 죽음에 관한 질문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태초부터 물과 불, 빛과 어두움, 죽음과 생명은 신의 영역과 위엄에 속해 인간의 숭배와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시에 온갖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적 표징을 자신에게 유익한 요소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술이나 마술의 대상으로 이용하다가, 곧 바로 합리적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을 질서와 조화를 통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첨단의 유전공학과 의학기술을 통해 생명과 죽음에 대한 임의의 조작도 할 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생명과 죽음, 물과 불, 빛과 어두움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연의 위력은 인간의 능력과 예지를 능가합니다. 그 모든 것이 창조주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이 모든 것을 잘 다스리십니다. 그분만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 바로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으로써 인간은 죽을 몸이지만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 여기 아래 비천한 곳에 인간이 되어 오셨기 때문이며, 불편한 말구유에서 고통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오직 성부의 뜻을 따른 성자의 순종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이 인간의 무력함이 된 때문이며, 하느님의 부유함이 인간의 가난함이 되었기 때문이며, 생명이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믿음과 기쁨으로 그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해 주셨다”(시편 126:3, 루카 1:49)고 고백할 뿐입니다.

박상대 신부 (백삼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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