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7-03-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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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없는 위대한 책

“적막한 옛 못. 개구리 날아든다. 물소리 퐁당.”
불경의 구석구석까지 달통한 바쇼, 당대 최고의 대선사와 법을 나누는 법거량을 하는 바, 대체 한 말씀 비집고 들이밀 틈도 없이, 그의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현란하고 박식한 현학의 장만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선사께서는 가부좌를 틀어잡고, 꼿꼿한 자세 그대로 촛대가 된 듯, 반쯤 감은 눈을 코끝에 걸어두고 애꿎은 단주만 굴리고 있는데.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눈으로 선사를 힐끗 훔쳐본 바쇼, 조금은 송구했던지, 촐랑거리며 머리를 치뜨는 알음알이를 애써 눌러놓고는, 지긋이 예를 갖춘다.
“선지식께옵서도 지남이 될 만한 귀한 말씀을 주시지요.”
그러나 선사께서는 묵묵부답, 미동도 없다. 재차 권해 보는 바쇼, 그제야, 헛기침으로 먼저 운을 뗀 선사께서, 나직이 말씀을 내려놓는다.
“거사님께서는 참으로 해박하십니다 그려. 시주 받아 공부하는 이 몸이 부끄럽기 한량없소이다. 헌데, 거사님. 남의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자신의 한 물건을 보여 주시구려!”
오랫동안,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이 이어지자, 두 사람의 눈에는 파란 불꽃이 피어난다. 그러고도 얼마나 지났을까, 죽음 같은 적막이 뼈 속 깊이 젖어들 즈음, 돌연, 작은 연못 속으로 청개구리 한 마리가 적막을 깨고, 퐁당, 날아든다.
그 소리에 그만, 걷잡을 수 없는 전율이 바쇼의 피를 타고 흩어진다. 적멸의 언저리에서 우주는 일순 깨어져나가고, 드디어, 번갯불의 허리춤을 낚아챈 바쇼는 애당초, 한 물건마저도 없는 허허 탕탕! 그 참을 수 없는 법열의 한 소식을 그렇게 토해낸다.
바쇼(일본 17세기)는, 자연과 삶을 잔잔한 유머와 허무를 섞어, 한 줄의 선시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하이쿠의 대가입니다.
당시, 일본 삼대 절경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마쓰시마(송도) 섬에서, 전 일본 하이쿠 경연 대회가 개최됩니다. 이미, 마음자리를 본 바 있는 바쇼는 그 경연 대회에서, 이러한 하이쿠로 대상을 거머쥡니다.
“마쓰시마, 마쓰시마!, 아! 마쓰시마!”
그러나, 한 줄도 길다고 해서 아예, 글자 한자 없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주입니다. 우주는 글자 한자 없는 위대한 책이라고 합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진리 그대로인데, 우리가 그것을 읽을 눈이 없어 읽지 못할 뿐이라고 합니다. 글자로 나타내는 진리는 다만, 글자 없는 진리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한낮,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춘화(봄 그림)라는 선시 중에는 글자 없는 위대한 책이 기막히게 묘사된, 이런 절묘한 구절이 있습니다.

『따슨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 읽어 무삼 하리요.』

박 재 욱 (LA관음사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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