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07-03-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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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에 별로 재능이 없었던 나는, 그림 그리는 대신 이것저것 떼어다 붙이는 ‘모자이크’ 작품 만드는 일을 더 좋아했다. 수채화나 유화 안에는 대상이 되는 인물이나 정물에서 느껴오는 미적 감각과 색상이 주가 되지만, ‘모자이크’에는 그 대상 안에 온갖 잡다한 조각난 부분들이 함께 모여있어 붙여진 대로 그 자체의 의미가 천만가지로 느껴져서 좋다.
마치 고요가 감도는 깊은 산 속 절간보다는 온갖 사람이 뒤섞여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는 장터 같아서, 그 안에서 다이내믹한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시로 교차되는 인간의 생각과 느낌이 그 안에서 생활하고, 그런 삶 하나의 기쁨과 아픔이 함께 용해되어 ‘모자이크’ 작품을 이룬다고 할까?
그래서 모자이크는 꼭 고운 색상이나 질감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든지 뜯어내고, 찢어내어 원하는 모형을 이루면 된다. 더욱이 모자이크는 대패질하여 매끄럽게 만든 나무 대신, 비바람과 폭풍에 꺾이고 쓰러진 원목 그 자체로 지은 통나무집 같아서 거부감 없는 아늑한 맛이 있어서 좋다. 남 기죽이게 잘 사는 부잣집 대신, 평범한 서민들의 집을 찾아갔을 때 편안함과도 같다.
이유는 그네들과는 내가 체험하고 사는 절망과 아픔, 걱정과 근심, 분노와 질시를 함께 나눌 수 있어, 남모르게 감춰놓은 마음속 상처가 자극 받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부잣집이나 명망가의 집안 대신 요셉과 마리아의 평범한 가정을 택해 오신 것은 아닌지?
수년 전 로마에 갔을 때 손바닥 반 사이즈의 조그마한 예수님 상반신의 모자이크를 샀다. 얼굴 한 면, 한 면과 가슴 하나 하나에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고뇌 조각이 전부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모자이크 예수님 상이 좋아서, 우리 부부는 아직도 거실 벽난로 위에 걸어놓고 가끔씩 바라보곤 한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의 한순간 삶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진하게 느끼게 된다. 부족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낀다.
알고 보면, 동식물은 꾸밀 필요 없이 있는 그래도 살아간다. 그러나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나쁜 것은 감추고 좋은 것만 보이려 꾸미기 때문에 보다 향상할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으나, 반면 인간은 만물이 느낄 수 없는 깊은 고독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다 잘 풀리고 형편이 좋아 보이는데, 오직 내 인생만이 망가지고 뒤쳐지고 실패한 것만 같을 때는 그 어느 곳에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아무도 완전하지 못하기에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서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각자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한 모습마저 사랑 받게 된다면, 우리의 내적 상처가 얼마나 수월하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올 때가 많다.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 도박 중독자들이 자기네끼리 모여 서로의 아픔과 괴로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임만으로도 쉽게 상처를 치유 받고 재기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찢겨진 상처와 아픔마저 소중히 간직하시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안에 아름답고 값진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고 계신다.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오늘 한 순간을 기쁘게 살아야만 되는 게 아닐까?

김재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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