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신앙의 길’

2007-01-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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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에는 요령을 피워야 살기도 쉽고 출세도 빠른데, 하느님 법에는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 외아들인 예수님 마저도 인류구원 사업에 요령을 않으셨기에 말이다. 그 분은 말씀 한 마디로 눈먼 사람의 눈도 뜨게 해주시고, 절름발이를 걷게 해주시고, 심지어 죽은 나자로도 무덤 안에서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오게 해주신 분이다. 그렇기에 그 분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도 없는 상황에서 축지법을 쓰셨다는 구절이 없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만명 이상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게 해주신 분께서 당신 자신은 시장하여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살펴봐도 열매가 없자 그 자리에서 말라버리게 하신 배고픔조차 겪으셨다.
우리 생각 같으면 차라리 배고픈 김에 무화과나무 보고 지금 당장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라 하여 즉석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불리 먹을 수도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연코 요령을 피우는 것을 거부하신 것이다.
당신이 피하시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십자가의 죽음조차 피할 수 있는데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소처럼 마지막까지 요령 피울 생각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에 주님을 따르는 신앙 길에는 요령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요령은 알고 보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얄팍한 인간의 지혜다. 제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자만하고 기고만장하지만, 결국은 우매하기 짝이 없어 스스로 속는다.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일초 후 제 자신 운명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과 이층 거리의 높은 곳만 올라가도 실제 존재하는 땅 위의 개미도 못 보는 눈으로 하느님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 어리석음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 지혜란 말이다.
그래서일까? 하느님 나라는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 같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만 마음이 팔려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뜨일 리가 없다. 속에 묻혀있는 것이라 수고해서 파헤치지 않으면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대충대충 요령껏 재주부리며 살려고 작정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좋으신 아버지!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애 같은 사람에게만 하늘나라의 보화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신 모양이다.
하늘나라의 보화는 손해날지 알면서도 계산을 접어두고 하느님 말씀을 우직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의 눈에는 조롱거리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이어서 바보(?)같이 손해보는 삶을 사신 그 분을 오늘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
신앙의 길은 그래서 세상 사람의 생각과 지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길이 없는 신비요 미스터리다.

김 재 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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