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성직자가 된 의학박사

2007-01-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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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시간표>

세상 모든 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 여기에는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고 자라는 때가 있기에 죽어야 하는 것 또한 그분의 시간표 안에 들어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인간에게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특별하신 선물이다. 인간에게만은 로봇 같은 기계 취급을 안 하시겠다는 창조주의 복안이다. ‘우리와 같은 모상을 만들자’ 하신 창세기의 기록처럼 창조주는 당신의 시간표를 인간에게 맡겨놓기로 마음먹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천년 같은 소중한 삶을 살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을 등지고 허송세월로 무의미하게 소모해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의 몫이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 눈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보면 시간의 개념이 반드시 수학적이 아닌 그 이상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억울한 인간들의 울부짖음 앞에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주고 싶어 안달하시는 하느님에겐 하루가 분명 천년 같이 길겠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의 지옥 불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죄인 중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그 분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이 빨리 줄달음질칠 것 같기에 말이다.
그렇고 보면 시간은 분명 사랑의 함량 관계다. 억울한 일이 겹치고, 악한 이가 제 세상처럼 설칠 때면 하느님은 무엇하시느라고 왜 이리 더디게 오시는가 인간들은 한탄하지만, 영혼 하나라도 더 구하시기를 원하는 하느님 편에서는 왜 이리 시간이 줄달음치는지 초조하실 만하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에 즉석에서 응답 받기를 원하는 초스피드 세상에 살고 있다. 즉석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기도를 하면 즉시 반응이 오는 하느님의 응답을 기대하나,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이 적힌 시간표를 따르시기 때문이다.
일례로 예수님은 특별히 사랑했던 나자로가 아파 죽게 되었을 때도 서두르지 않으셨다. 그래도 예수님은 나자로를 살려내셨다. 주님은 늦게 오신 것이 아니라 단지 늦게 오신 것 같이 보일 뿐이었다.
우리가 땅바닥을 치며 울부짖는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현장이나 수백만명의 유대인이 개스실로 끌려가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분명히 잠자고 계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표로는 정말 모든 것이 끝장이 나버려 기진맥진되었을 때야 하느님은 응답을 보내실 때가 많다. ‘하느님 어찌 이런 일이’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제임슨 답슨의 말처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시간표는 인간의 시간표와 같지 않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의 최종 결과가 가장 좋게 나오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틀림없이 정확한 순간에 정확하게 개입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으로부터 응답의 소식이 들리기까지, 우리는 공연히 비지땀을 흘리지 않는 ‘믿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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