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니 저 몸으로?”놀라운 학업의지

2007-01-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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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몸으로?”놀라운 학업의지

중증 뇌성마비 1급인 박지효씨는 뒤틀린 몸 속에 의지만은 활짝 꽃피우고 있다. 어머니 백정신씨는 그를 세상과 통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다.<진천규 기자>

USC 석사과정 박지효씨‘인간승리’

말 못하고 몸 못가누는 중증 뇌성마비
한 손가락 타자로 밤샘 리포트‘올 A’
밀알선교단, 장애인의 희망에 장학금

박지효씨(27)는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 자판을 친다. 중증 뇌성마비 1급이라 왼손은 아기처럼 가누지 못하는 목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이 아래로 축 처진다. 오른손에서는 그나마 가운데 손가락 하나로 자판을 두드린다.
그래도 박씨는 2006년 가을 학기에 USC 전기공학부 석사과정에서 A만 받았다.“제발 해 뜨기 전에 자라”는 어머니 백정신씨(60)의‘탄압’을 뚫고서다. 느릴 수밖에 없는 타자 속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어머니는 애태우며 바라만 본다.
말도 못 하고 몸도 못 가누는 박씨지만, 신도 박씨의 의지만은 꺾을 수 없었나 보다. 성한 사람도 감히 도전하기 힘든 유학 떠나는 걸 박씨는 끝내 이루었다.
박씨가 뒤틀린 몸을 부여잡고 동이 틀 때까지 리포트를 쓰는 이유는 단 하나.‘장애인 대표 유학생’이라는 의무감이다.
“2005년에 지효가 유학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얼마나 많은 장애우 부모들이 전화를 걸어왔는지 몰라요. 지효만은 꼭 성공해서 돌아와 장애우들의 자존심을 세워달라고 당부하더군요. 그걸 아는지 지효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어떻게 온 유학인가. 간경화로 생명이 위태롭던 아버지는 2005년 가을 USC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박씨가 유학을 연기하려 하자“나는 어차피 갈 사람이니, 예정대로 떠나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해 10월 끝내 눈을 감은 아버지는 박씨의 가슴에 묻혔다.
미국 학교도 입학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았다. 토플 성적이 문제였다. 30분 안에 글을 써야 하는 작문 시험이 박씨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 독수리 타법인데 무슨 수로 시험을 본단 말인가. 미국 학교들은 토플 점수 부족으로 박씨에게 탈락 통지서만 보냈다.
박씨의 모교인 한양대 교수들이 돕기 시작했다. USC를 졸업한 한양대 교수들이 박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USC에 알렸다. 박씨가 영어로 의사 소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설득했다. 교수들은 떠나는 박씨에게 생활비로 2만달러를 모아주기도 했다.
미국에 오려니 어머니 백씨의 비자가 문제가 됐다. 혼자서 밥도 먹기 힘든 박씨를 옆에서 지켜야 하는 어머니에게 주한미국대사관은 방문비자 밖에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박씨는 이런 자신의 사정을 장문의 편지에 담아 대사관에 보냈고 이를 본 영사가 예외를 인정해 어머니에게도 학생비자를 발급해주었다.
USC 교수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강의실에서 처음 박씨를 본 교수들은 공부를 따라올 수 있을까 갸우뚱했다. 그러나 첫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는다고. 필기는 꿈도 꾸지 못하는 박씨는 수업 내용을 한번 듣고 다 외워버린다.
박씨는 한양대에서도 4.5점 만점에 평균 3.88점을 받고 졸업했다. 이런 박씨를 한양대는 교비 유학생으로 지원하고 있다. 대학 입시에 한번 떨어진 것 빼고 지금까지 박씨는 정규 교육과정을 제 시간에 다 마쳤다. 초등학교만 장애우 재활학교를 다녔을 뿐, 나머지는 비장애우와 같이 다녔다.
박씨는 10년 계획으로 박사 학위까지 딸 생각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꿈꾸던 천문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 요새는 USC 교수들을 통해 우주항공국(NASA)에서 인턴십 기회를 알아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박씨가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2002년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있다. 아버지가 아프신 뒤 가정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약사 누나(지연·28)는 오전 6시∼오후 11시 약국 여러 곳을 돌며 일을 하고 있다. 누나는 생활비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박씨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동생에게는 엄마를 독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하다. 얼마 전 동생이 어머니에게“엄마는 나 떼 놓고 갔잖아”라고 한 말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박씨는‘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공부한다. 그게 마음의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박씨도 학교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게 있다. 발표다. 말을 못하기에 남 앞에 설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해주는 특수 컴퓨터가 필요하다. 가격이 1만달러로 낮아졌지만, 차 한 대 없이 지내는 형편에 컴퓨터를 갖는 건 꿈만 같은 일이다.
이런 박씨를 돕기 위해 밀알선교단(단장 이영선)은 20일 많지는 않지만 장학금을 전달한다.

<김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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