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6-12-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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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와 방편

모퉁이의 빈터에 빽빽이 모여 선 어린 전나무들이 어느 따사로운 거실에서 꾸며질 화사한 자신의 신부 화장을 기다리며 가지런하게 발돋움하는 오후, 선물 가게의 유리 창문에는 눈썰매를 타고 앉은 뚱뚱한 산타클로스가 연약한 사슴을 앞세운 채 예외 없이 한 쪽 눈을 찡긋하며 행인을 향해 의미 있는 눈웃음을 치고 있다.
바늘잎에 쌓이는 흰 눈발도, 둔해 보이는 붉은 외투나 털보송이가 달린 고깔도 그 옛날 유대 땅에는 없었을 테지만, 예수님이 혹시 지금 암행어사처럼 길거리에 나타나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좋은 방편들이라고 하실까, 아님 신기해하고 낯설어 하실까?
부처님은 성도하신 후 45년 동안을 쉴 새 없이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알아듣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수많은 설법을 하셨는데, 주로 초반에 펴신 가르침의 핵심은, 삶이란 언제나 변하는 덧없는 것이며 괴로움임을 깨달아 성냄, 욕심, 어리석음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도록 하신 것으로 아주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었지만, 여기까지에만 머물러 있는 불교를 뒷날 사람들이 작은 수레, 곧, 소승불교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공’의 가르침으로, 삼라만상은 실체가 없이 비어 있으며, 이러한 공허한 세상에서 괴로움에 빠져 허덕이는 중생들을 어떻게 건져내고 도울 것인가 하는 큰 수레, 곧, 대승불교의 가르침인데, 인도에서 비롯된 이 가르침은 곧 이어 북녘의 여러 나라에서 크게 흐드러졌다.
마지막으로는 ‘선’의 가르침인데, ‘연꽃을 들고 말없이 웃음만 짓다’라는 이야기에서 보듯, ‘마음’이란 어떠하다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대신, 이 순간 나의 마음을 바로 ‘들여다보게’ 하는 가르침이었지만, 이상의 세 갈래 수많은 가르침들을 한데 모아 한 마디로 줄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참나’를 깨달아 남을 돕고 살라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부처님의 열반 후 그 가르침들은 역사의 바퀴에 실리고 문화의 장식이 덧씌워지면서 넝쿨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는데, 그 한 쪽 줄기가 설산을 넘고 사막을 가로질러 황토바람 속에서 만발하더니 무궁화 동산에도 얼기설기 뿌리를 내렸다.
이윽고 그 씨앗들이 바람 따라 동쪽으로 한 바다를 건너와, 올림픽가니 플러싱이니 하는 한인촌 인근 이곳 저곳에 떨구어져 어렵사리 싹들을 틔웠는데, 돌보는 이 적고 가꾸는 이 드문 메마른 이 땅에 뿌리 내리고자 간구하는 미주 한인 불자들과 그 사찰들의 부처님을 향한 서원 및 생존을 위한 온갖 방편과 몸부림은 자못 처절한 바가 있다.
무엇을 위한 뿌리내림이며 누구를 향한 몸부림인가? 지금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행려병자처럼 문득 문간에 나타나 하루 저녁 몸 누일 곳을 청하신다면 이를 알아볼 선재동자는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인가? 그 분의 이름을 빌어 우리가 짓고 있는 갖가지 업들을 그분이 보신다면 황당해 하실까, 눈감아 줄 만한 기특한 방편이라 하실까?
그 분은 아마 사십구재니 백중기도니 인등이니 기와불사니 화주책이니 하는 말들을 귀설어 하실 것이지만, 그것들이 다만 ‘참나’를 깨달아 남을 돕고 살려는 진지한 방편들인지만 물으실 것 같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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