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윤실 호루라기 ‘훼비의 눈물’

2006-11-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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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지진으로 폐허가 된 띠땅 마을에 훼비네 식구가 있다. 큰 딸 훼비(사진 오른쪽)는 19세, 남동생 하빗(왼쪽),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막내 아나. 훼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됐다.
9년 전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잣디나무처럼 세 자녀의 인생을 떠받들던 어머니가 자바섬의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200만명도 넘는 이재민이 길거리에 나 앉는 신세가 되었지만 바나나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겨우 몸만 가리고 살게 되자 언제나 곱기만 하던 하늘이 회색 빛 어두움으로 변했다.
500여 가구가 채 되지 않는 띠땅 마을을 찾았을 때는 르바란 명절이었다. 한국의 추석 같은 민족 대명절이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골프 장갑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훼비의 친구 서너 명이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 왔다. 어려움을 만난 이웃을 찾아 마음을 나누는 아름다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부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르바란 명절 기간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지나간 동안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영육간의 잘못을 용서해주세요”라는 뜻의 인사를 한다.
착한 사람들. 지은 죄가 없어도 이웃들과 화목한 삶을 원하는 사람들. 훼비네 동생들마저 똑같은 인사를 건넸다. 그래 너희들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게야.
고마운 것은 훼비네 식구의 처절한 사연이 알려진 이후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찾아 온 선교사가 비바람 견딜 임시 가옥 하나를 지어 주었다. 부서진 벽돌을 재생하느라 시멘트를 걷어 내고 대나무를 엮어 벽을 만들었다.
집 하나를 재건축하느라 들어간 돈은 250달러가 전부다. 평당 가격이 1억원을 넘는 아파트가 있다는 한국 부동산 시세는 이들에게 아득한 전설일 뿐이다. 매주 띠땅 마을을 찾는 오상윤 선교사는 이번 재난으로 고통받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역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현지인의 삶과는 동떨어진 사역을 하게 되는 한인 선교사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재난이 현지인의 영혼을 연결시켜준 축복이 된 셈이다. 500여 가옥 가운데 적지 않은 집들이 한국교회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 무슬림 마을인 이곳에 50여채의 집을 지어준 기금은 물론 한국 교회의 정성어린 헌금이다. 그래서인지 건물 외벽마다 이 집은 한국교회의 사랑으로 지어진 집이라는 저들의 고마움이 동네 골목마다 짙게 배어 있다.
무슬림을 껴안은 것이 선교의 지경을 넓히는 계기도 된 탓일까? 이래저래 다리 품하며 이들을 찾는 오 선교사가 흥이 날 일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고대하였던 현지인 교회가 이들이 마음을 열면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훼비가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다니던 공장 일을 접고 어머니가 감당하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 자바 신부 드레스 공장에서 외주 가공 일을 받아 구슬을 엮는데 한 달 네벌을 마치면 받게 되는 공임이 12만루피아이다. 약 13달러다.
동생 하빗의 학비로 매월 2만5,000루피아를 떼고 나면 나머지가 세 식구의 생활비다. 막내 아나가 내년 중학교에 진학할 때 신입생으로 내야하는 목돈 250달러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생목이 오른다. 그리고 하빗의 학비 외에 막내의 학비가 추가될 것이다. 훼비가 소녀 가장이 되어 새가슴이 되어 가는 피눈물을 뉘라서 알까? 훼비네 식구들에게 르바란 명절의 즐거움이 언제 평안히 찾아올까?

양국주 (워싱턴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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