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목자 칼럼 ‘예수의 어머님 이야기’

2006-11-17 (금)
크게 작게
매일 아침 모닝 커피에 빵 두 조각을 먹는데, 요즘은 모자란다. 비둘기 두 마리가 발코니에 와서 더 달라하기 때문이다. 40년 전 신학원 생활할 때 시작된 커피와 토스트로 여전히 아침식사를 한다. 중학교 음악선생을 할 때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근했지만, 신학생 생활은 아침 기도 후 간단한 음식을 먹고 강의에 들어가야만 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노후생활을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는 동료(노인)들의 권고에도 오전에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식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이 비둘기 한 쌍에서 한 마리는 왼발을 전다. 이것에서 하나님에게 바치는 짐승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구언약의 예배 규정 말씀이 생각났고, 또한 예수 어머님의 첫 아들을 위하여 정결례 예배에 바친 비둘기 한 쌍이 어떤 것이었는가에서, 이 제목을 생각하게 됐다.
주일학교 성가대 지휘자를 할 때 일이 생각난다. 언제인가 특송으로 아베마리아를 합창하였는데, 담임목사님에게 불려가 혼이 났었다. 그런데 그때 내 생애에 변화(개종)를 가져온 사건이 일어났다. 음악대학 2학년 합창시간에 라틴어로 된 베르디 작품 레퀴엠을 하게 됐는데, 지금까지 개신교에서 접하지 못하였던 교회 음악이었다. 이 곡은 라틴 노래의 진수라 성가대에서 시도된 것 같다.
목사님과 왜 아니 되느냐를 놓고 토론하던 중에 마리아 숭배를 알게 됐다. 그러나 예수 어머니 복음 또는 마리아 복음이라 하는 누가복음을 나는 좋아한다. 여기에는 4대 송가로 엘리자벳 송가, 마리아 송가, 사가랴 송가, 시므온 송가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처녀가 아기를 배어 두려운 마음에 언니 엘리자벳을 찾아가 주고 받는 송가에서 Magnificat이라 불려지는 마리아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 복음에는 어머니의 포근함과 부드러움 또한 어머니가 본 소년 예수를 알게 된다. 그리고 선생님의 수난에 두려워 제자들까지 떠났지만 끝까지 아들의 십자가 밑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는 어머니의 사랑을 찾아본다.
어머니의 포근함을 찾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마리아의 성화 속에서 다시 구 언약의 말씀이 생각난다. 신명기에서 야훼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길 속에 나타났지만, 모세는 하나님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하시며 또한 ‘여자의 형상’(4:16)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다시 성만찬 상에서 예수의 ‘살과 피’로서 예배의 핵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사진을 보관했다가 자손에게 보여준다. 이같이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형상을 가지고 기억하려 한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은 ‘말씀’이란 언어를 통해 자기의 형상을 남겼지 않은가. 이것에서 한계성을 갖는 인간의 예술적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말씀으로 표현되는 진리가 인간의 언어에서는 역사적 제약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새 언어인 컴퓨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