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목자 칼럼 ‘이판사판의 교회’

2006-11-03 (금)
크게 작게
이판사판이란 가끔 이런 결론이 날지 또는 저런 결론이 나올지 모를 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뜻은 이성적인 판단이냐, 사무적인 판단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것은 불교에서 진리를 위하여 수행에만 전념하는 수도 스님을 가리켜 이판 승이라 하고, 사무를 위하여 경영에만 전담하는 행정 스님을 가리켜 사판 승이라 하였다 합니다. 이제 오늘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나오는지, 사무적 비즈니스를 위해 나오는지를 생각해 보고, 마지막 때에 지옥으로 떨어질지, 천당으로 올라갈지, 이판사판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쓰는 서글픈 글이 되겠습니다.
성서에는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 목사와 신부라는 직분이 있는데,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전통적으로 목자는 목자(pastor)에서, 신부는 제사장(priest)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목자 장으로서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실 때 “세상에서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 1:29)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교회의 우리(folds)에 들어온 양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목자로서 선한 목자인지, 돈을 위하여 일하는 삯군 목자인지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성자라고 불렸던 나의 영적 스승 대천덕(Arthur Torrey)신부님의 생활을 찾아보려 합니다. 처음 예수원을 찾아갔을 때는 큰 예배당이 있었고, 손님방은 샤워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기보다도 어렵다는 가르침이 생각나는데, 이제 부자가 된 예수원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는 어렵겠습니다’고 할 때 쓸쓸히 웃으시는 얼굴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부자 교회가 되려하고, 성장에만 관심을 가지면 사판의 교회가 될 위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 부름 받아 들어온 어리석은 양들은 아직도 주님의 음성에 익숙지 못함으로 무속적인 소리에도 쉽게 귀를 기울인다는 말입니다.
결론을 내고 싶습니다. 언제나 주장하는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합니다. 이것은 비드니 지방 총독(111-114년)의 긴 보고서에서 ‘그들은 해뜨기 전에 모여 조용한 교송으로 노래하고, 미신행위를 한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 미신 행위는 ‘살과 피를 나누는’ 생명의 양식인데, 이를 위하여 생명을 건 성찬 예배가 그것입니다. 이 뜻을 모르는 사람은 나가달라는 데서 미사 예배가 시작됐지만, 조용한 성찬 상에 생명을 걸었다는 것을 찾아봅니다. 오늘의 세상이 다수의 폭력과 시장경제로 평가하지만 사판의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상에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따르던 많은 제자들은 떠나고, 오직 12제자만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김 경 덕 신부 <성공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