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 신학 ‘제사’

2006-10-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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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덕분으로 졸업 후 수십년간 연락이 끊겼던 대학 동창들을 다시 만나 전자상으로나마 친교를 하고 있다. 그동안 궁금했던 소식도, 각자 사는 곳의 이야기도, 각기 사회에서 활약하며 느낀 점도 인터넷 카페를 통해 교환한다. 인터넷이 이 세상을 참 좋은 세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전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보니 개신교인인 한 동창은 추석을 맞아 시댁에 차례를 지내러 간다고 하고 독실한 가톨릭 교인으로 알고 있는 다른 동창은 갑자기 집안어른이 되어서 제사에 대해 더 잘 배워야겠다고 한다. 지난번에는 잘 몰라 어정쩡 치렀다나. 30년전에 고국을 떠난 나로서는 ‘기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백여년 전에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교는 제사를 조상숭배로 인식하고 교인들의 제사를 금했다. 그보다 백년 뒤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제사를 금하는 것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을 입교의 첫 과정으로까지 내세웠다.
한 종교가 이방 땅에 정착할 때 흔히 현지의 종교와 혼합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현지의 토속 바알교를 흡수한 결과 ‘성전 창기’등의 바알교의 제도가 이스라엘에 도입되었었다.
로마인들은 4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는 기독교 전에 자기들이 갖고있던 풍습을 다 버리지 않았다. 수백년간 지켜오던 태양신 미트라의 축제를 버리기가 아쉬워서 그 축제일을 크리스마스로 바꿨다. 아기 예수는 12월25일에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 날은 그저 미트라의 축제일이었다.
유럽의 교회 건물들은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할 때까지는 교회 건물이라곤 없었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건물을 짓자니 로마의 관공서 모양을 따르게 되었다. 유럽의 큰 교회들을 바실리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원래 관공서를 의미했다. 이교도 시절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교회의 건축양식으로 흡수한 것이다.
기독교는 유럽 뿐 아니라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현지의 풍습을 흡수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일제시대에 끌려간 한인 후예들이 산다는데 그들에게 파견된 한 선교사의 글을 보니 거기 주민들이 각 집에 제단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제단 가운데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상만 걸렸을 뿐 고유의 미신적 제사와 흡사하다고 했다. 그 지방에서는 기독교와 토속 신앙의 혼합이 묵인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에서는 한국의 풍습과 기독교 중 하나 만을 택하라고 강요했을까? 왜 제일 중요한 풍습인 제사를 금했을까? 가족들이 오래간만에 모여 같이 음식을 나누며 정다운 시간을 갖는 것을 제사라고 해서 꼭 금해야 했을까? 조상을 ‘숭배’ 하지말고 ‘기억’ 하라고 하면 안되었을까? 이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나 한강변에서 목이 잘리는 참변을 당하면서까지 제사를 금했으니 그 당시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풍습을 버리라는 한국 기독교의 전통은 외국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더 큰 문제가 된다. 한인 교회들은 기독교의 영웅들인 이스라엘과 유럽, 심지어는 미국인 조상에 대해서도 많이 가르치지만 우리의 조상 영웅들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질 않는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굳이 묻는다면 아마 우리 조상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들에 대해 가르치는 것도 아니니 우리 애들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지 못하는 것을 탓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는 개신교인이 차례를 지내러 가고 가톨릭 교인이 집안어른이 되어 제사를 바로 지내기 위해 더 배우기를 원한다니… 이제는 참 한국인이면서 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일까?
(http://blog.daum.net/youngsworld)

김 영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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