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별기고 ‘한글과 세종대왕’

2006-10-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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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글이 없었던 시대, 모든 학문은 중국에 의존했으며, 특수층들만 한문을 잘 익히고 지식인으로서 득세하고 기득권을 유지하였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문맹자였다.
이런 상황에 세종대왕은 우리 글을 만들었으니 백성들은 매우 감격했으나 반면에 지식인들은 엄청난 반발을 하였다.
특히 집현전 원로 학자들이 집단으로 반대하고 나섰는데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신하들과 상의도 없이 굳이 언문을 임금 독단으로 만들고 갑자기 널리 펴려 한다며 한글을 만든 것은 신기한 재주를 부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을 했다.
세종은 몹시 화가 나서 이런 원로 신하들을 모두 하옥시키자 전국적으로 유생들의 상소가 들끓었다.
이런 험난한 분위기 속에서도 세종대왕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한글을 보급하려 했던 큰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불교에서 찾아야 한다.
조선시대 유교를 국교로 숭상하던 시절, 세종대왕은 불교에 매우 심취했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불교를 알리고 싶었지만 한문으로 된 불경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알지 못하므로 우리 글을 만들게 된 숨은 동기라고 학자들은 ‘세종실록’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세종은 부인 소헌왕후가 죽자 “돌아가신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방법으로 불교경전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세종은 한글이 완성되자 본격적으로 번역 사업을 착수하고 아들 수양대군에게 ‘부처님 일대기와 불교 경전’을 번역하도록 명령했고, 그 완성한 책이 방대한 분량(24권)의 ‘석보상절’이다.
이 가운데 부처님의 일대기는 전기 문학으로서 국문으로 번역된 최초의 산문 작품이다. 세종은 ‘석보상절’을 독경하며 소헌왕후의 극락왕생을 빌었고 백성들에게도 불경을 읽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세종은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내용은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추듯이, 부처님의 공덕이 세상을 두루 비추고 있다고 칭송하는 서사시로서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국문시조이다.
불경 번역 작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자 유학자들의 상소도 더욱 강해졌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단호한 의지로 한글 보급을 위해 불경 번역사업을 끝까지 주도한 결과 한글이 자리를 잡게되었고 오늘날 존재하게된 것이다.
한글과 세종 그리고 불교는 뗄 수 없는 인연이었고, 한글의 탄생은 세종의 불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글 덕분에 한국은 이웃 나라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우리 것을 지켜올 수 있었기에 한글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빛나는 문화 유산이며,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세계에는 194개의 국가가 있지만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동시에 갖고 있는 나라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한글이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자랑스런 민족인가.
한글날을 맞이하여 세종대왕을 추모하자.

석타 스님 <정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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