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진리의 낙관들

2006-09-22 (금)
크게 작게
한인들이 많이 찾는 큰 선물 가게의 한 쪽 구석에 여기서는 별로 사 가는 이가 없어서인지 먼지 앉고 빛 바랜 열두 폭 월령 병풍이 펼쳐 있다.
목동을 태운 소는 복사꽃이 흐드러진 얕은 언덕을 돌고, 피리 소리에 놀라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장끼를 따라가면 다음다음 폭엔 개울가에 천렵이 한창이다. 자갈밭에 노구솥은 걸어 놓은 한 떼의 사람들이 얕은 물에 베잠방이를 걷고 들어가 반두를 맞잡고 웃으며 물고기를 뜨고 나무 그늘엔 앞섶을 풀어 헤친 늙은네가 한가로이 부채질을 한다. 쪽머리 아낙네와 떠꺼머리 아이들이 말탄 어린 신랑이 이끄는 가마 행렬을 훔쳐보는 담장 너머 텅 빈 하늘엔 오롱조롱 감이 붉고, 겨울이 온 마지막 논바닥에는 토끼털 귀막이를 한 아이들이 얼음판 위에 팽이를 치는데, 어린 동생을 들쳐업고 구경하는 역시 어린 누이는 버선발에 꽃고무신을 신었다.
이리 보면 인생이란 얼마나 흐뭇하고 아름다운 파노라마며 세상이란 얼마나 즐겁기만 한 잔치마당이더냐? 더구나 그것이 이제는 되살릴 수 없는 지난날 우리들의 사라져 버린 풍경이라면! 지신 밟는 남정네들의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래선지 흥에 겨운 작가는 그림 폭마다 잘 읽을 수 없는 싯귀를 내리 갈기고는 그 끝자락엔 자신의 멋과 인생관을 함축한 붉은 낙관을 눌러 놓았다.
그런데 부처님이 보신 풍경은 이와 사뭇 다르다.
병풍의 첫 폭 속의 아이가 열두 칸을 지나 끝 폭이 되면 벌써 한 살을 더 먹고, 이렇게 해 마다 한 번 얼음 위에서 팽이를 친다 해도, 그 아이는 미처 백 번을 못 채우고 곡소리 속에 흙에 덮이거나 뼛가루를 바람에 날려보내야 한다. 이뿐이랴?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긴 시간과 먼 공간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서 그렇지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면 이 지구도, 우주도 변하고 없어진다. 하물며 인생이니 사랑이니 말씀이니 하느님이니 이념이니 조국 따위는 더 말해 무엇하리?
이렇듯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지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을 구태여 찾는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 법칙 하나 뿐이니, 부처님은 이 세상의 참모습이란 그림에 ‘덧없음’이 란 낙관을 누르셨다.
부처님은 두번째로 ‘나 없음’이란 낙관을 누르셨다. 우리 각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자신만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바둥거리는 이 세상에 ‘나’가 없다니, 부처님도 가끔은 장난끼가 발동하셔서 그런 황당한 도장을 파 오기도 하시는가? 그건 장난이 아니라 우선은 나를 버려야 ‘참나’가 살 수 있다는 윤리적 요청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라는 것은 물질과 느낌, 생각, 하고자 함, 헤아림이란 다섯 무더기 재료가 일시적으로 모여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일 뿐 고정된 실체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헤쳐 놓으면 엔진이요, 바퀴요, 전조등이요, 안테나요 하는 것들을 모아서 끼워 놓고는 볼보요, 현대요, 도요타요 하는 것이며, 그 차들도 매 순간 주행거리가 늘어나 낡아가며 어느 순간도 고정된 것이 아님과 같다.
이렇듯 내가 없고 덧없는 이 세상을 그런 줄도 모르고 고통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보신 부처님은 이 세상에 ‘괴로움’이란 낙관을 누르셨다. 그런 다음 이들을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빼내어 깨달음과 기쁨의 저 언덕으로 건네 주시고자 손수 뗏목을 엮으시니, ‘건너감’이란 마지막 낙관은 희망의 깃발이 되어 뱃머리에서 출발을 펄럭였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