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저녁 한끼

2006-08-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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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학교 ‘윌셔 스마일링 트리’의 이정화 원장은 남가주 한인 어린이학교의 산증인이다. 벌써 20년전에 LACC에 한국어 유아교육과정 클래스를 개설하여 그동안 수백명의 교사들을 배출해냈으니 타운내 수많은 어린이학교의 대모인 셈이다.
그런 이원장이 요즘 들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이를 맡기려고 문의하는 엄마들마다 반드시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거기 저녁도 해줘요?”라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아이를 맡겨놓으면 프리 스쿨에서 아침도 먹여주고 점심도 먹여주는데, 그것도 모자라 저녁까지 학교에서 먹여주기를 바라다니, 도대체 엄마가 돼서 아이들에게 밥 한끼 안 해주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엄마가 매일 오후 식당에서 투고한 음식 박스를 학교에 맡겨두고 간다고 한다. 그러면 학교 끝나는 시간에 가정부 할머니가 와서 아이와 함께 투고 박스를 픽업해 가는데 그것이 그 아이의 저녁이라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투고 박스를 가져가는 할머니가 “이 아이 몸에서는 미원 냄새가 난다”고 말할 정도로 사먹는 음식에 찌들어 사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요즘 들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 이원장의 증언이다.
사실 이같은 현상의 이면에는 어린이학교가 받는 정부보조금 문제도 있다. 이원장에 따르면 프리 스쿨에서 아침과 점심뿐 아니라 저녁까지 제공하는 경우 보조금이 상당히 많아지는데 학교들은 돈을 더 받기 위해 저녁까지 제공하고, 엄마들은 밥하기 싫어서 이런 학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학교 입장에서 보면 그 액수의 차이가 매우 유혹적일 만큼 크지만 그래도 이원장은 절대로 학교에서 저녁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저녁 한끼만은 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그녀 자신의 철학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낮에는 어린이학교 원장으로, 밤이면 LACC 교수로 투잡을 뛰면서도 저녁식사를 꼭 직접 해 먹였어요.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는 날도 많았죠. 그래도 그 전날 식사준비를 다 해놓고 나와서 저녁만큼은 반드시 남편과 아들들이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 자란 아이들이 ‘우리 어릴 때 엄마가 일을 했었어?’라고 물어볼 정도로 엄마 없는 자리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게 바로 저녁 한끼 열심히 해먹인 덕분이죠”
윌셔 스마일링 트리에서는 한 달에 한번씩 부모가 도시락을 싸보내는 날을 정해놓고 있다. 한달에 하루만은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먹게 하고 싶어서 만든 날이란다. 그런데 그거 하나를 싸주기 싫어서 그 전날부터 툴툴거리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싸오는 도시락을 보면 이 아이가 집에서 어떻게 식사하는지 한눈에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도시락을 제대로 싸보내는 엄마는 다시 보게 되는 반면 평소 아무리 잘난 척 하던 여자도 도시락이 엉망이거나 매번 사보내는 것을 보면 그 집의 식탁 분위기가 어떨지 대강 짐작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가 학교에서 식사하는 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식탁에 잘 앉아있지 않고 자꾸 일어나 돌아다니는 아이는 대개 집에서 부모와 함께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는 아이라는 것을 교사들은 금방 알아차린다고 한다.
“우리 자랄 때 자폐증이라는 걸 알기나 했나요. 지금은 자폐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 한 반에 한명 정도씩 있어요. 갈수록 성격이 하이퍼 한 아이들도 많아지고, 아토피 피부병은 너무 흔하지요. 그게 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식구(食口)란 한자어로 ‘먹는 입’이란 뜻이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 먹는 일, 옛날에는 아주 당연했던 일상생활이 왜 이렇게 하나둘 허물어져 가는지 모르겠다.
아침은 허둥지둥 빵이나 시리얼로 때우고, 점심은 각자 흩어져 사먹고, 저녁 한끼다. 요즘 세상에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고 그때 다 함께 먹는 것은 밥만이 아니다. 사랑을 먹고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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